2013년 2월 24일 일요일

예술에 대한 잡담



 어제는 도산공원 쪽 에르메스 매장에 있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가서 김영일 작가의 <귀한 사람들>전을 관람하고, 가야금 공연을 감상했다. 친한 누나가 김영일 작가의 팬이었고, 나로선 그 덕에 좋은 문화생활을 한 셈이다.
 김영일 작가는 본래 초상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분으로, 잘은 모르지만 이 분야에서 대단한 분인가 보더라. 사진작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20여년 전부터 우리 전통 음악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카메라 외에 녹음기도 함께 들고 다니며, 우리 소리를 기록하고 널리 알리려 애써왔다고. 현재까지 70여종의 국악음반을 제작했고, 그 중에 정가악회 3집 '여창가곡'이라는 음반이 2011년 제 54회 미국 그래미 어워드에 국내음반 역사상 최초로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니 대단하다.

 에르메스 매장에 들어가 본 것도 처음이었고, 사진전도, 국악도 나에게 생소해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개인적으로 사진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분야에 대해서 꽤 전부터 품어온 의문이 몇 가지 있었다. 사진과 공연을 관람한 뒤에 매장을 나서니 다시금 의문이 피어올랐는데, 우연히도 어제 저녁에는 미술관 큐레이터를 하는 분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운 좋게도 그 분께 관련된 질문도 하고, 대화도 나누며, 의문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네.

 이번 기회에 내가 가져왔던 의문들을 블로그에 풀고 해답을 찾아볼까 한다.


1. 나는 늘 뭐가 예술이고, 뭐가 좋은 그림인지, 좋은 사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은 붓자국도 피카소가 하면 예술이 되고, 내가 하면 장난이 되는 것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인 미술은 허영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큐레이터 분은 이런 내 질문에 대해서, 미술가로서 피카소가 보낸 삶과 나의 삶이 다르고, 붓자국 하나에 담은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피카소의 붓자국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피카소는 아주 어려운 그림도 그릴 수 있지만, 절제된 붓자국 하나를 그려낸 거에요. 보통 사람이 똑같은 붓자국을 그릴 수 있다고 해도, 그 둘을 같다고 말할 순 없죠."
 수긍이 가는 답이지만, 반박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지나온 삶이나, 담긴 의미같은 것은 눈에 보여지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막연한 것이다. 나라고 아주 예술적인 의미를 붓자국에 담아내지 못하리라는 법이 어디있는가?
 그림 그 자체로(혹은 사진 그 자체로) 포착할 수 없다면, 왜곡되기도 쉽고, 객관성을 획득하기 힘든 것이다.

 나는 아주 복잡한 연주를 해낼 수 있는 프로연주자들이 들려주는 깔끔하고 절제된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확실히 더 복잡한 연주만이 음악의 정수는 아니다. 더 간단한 연주가 더 감동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차이란 관(람)객이 포착할 수 있어야만 할 것 같다. Steve Gadd이 쳤다는 이유만으로 특징없는 드럼연주가 명연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만있자.. 그렇지만 과연 꼭 관(람)객이 포착할 수 있어야만 할까?


2. 내가 마지막으로 활동했던 밴드는 주로 카피곡을 연습했지만, 자작곡도 조금 썼다. 한 번은 스튜디오를 빌려서 밤새 자작곡을 녹음한 적이 있다. 녹음은 보통 리듬파트를 가장 먼저하고, 그 다음에 멜로디파트, 마지막으로 보컬 녹음을 한다. 녹음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작업이다. 왜냐하면 악보대로 '정확히' 연주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연주자도 녹음을 하다보면 조금씩 리듬이나 음정이 엇나간다. 연주자에게 스튜디오 녹음은 음악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를 표현하는, 가장 숭고한 과정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은, 처음에 드럼 연주를 녹음할 때였던 것 같다. 중간에 필인(feel-in) 연주를 녹음했는데, 연주가 정확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무식한) 나는 대체 어디가 틀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만큼 비 전공자에게는, 아니 전공자라고 해도 그 파트만 세심하게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틀렸는지 알 수 없는 연주였다. 그럼에도 드럼 연주를 녹음하던 친구는 연주를 다시 녹음하고 싶어했고, 신경이 온통 곤두서서는 두세 차례 반복해서 연주한 끝에 그 부분의 녹음을 끝낼 수 있었다.

 김영일 작가의 사진전에서 한편에는 필름으로 촬영된 초상사진이 걸려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디지털로 촬영된 초상사진이 걸려있었다. 작가는 필름 사진들을 찍기 위해 촬영된 국악인들과 인연을 맺고, 사진을 찍기까지 20여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반면, 디지털 사진을 찍기 위해 촬영된 국악인들은 페이스북으로 인연을 맺었고, 사진을 찍는데 불과 몇 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이러한 설명이 사진감상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더해준 것은 맞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사진들을 바라봐도, 나는 전혀 필름 사진과 디지털 사진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없었다. 솔직히 내가 구별하지 못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왜 김영일 작가가 초상사진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아니 애초에 잘 찍은 사진이라는게 뭔지도 잘 모르겠더라.

 전에 음악에는 내재된 '가치'가 존재하고, 그것은 더 높은 소양을 갖추어야만 향유할 수 있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 사진이나 미술도 그것을 풍부히 즐기려면 소양을 갖추어야만 한다. 어쩌면 내가 미술작품, 사진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나 자신의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삐딱하게 생각할게 아니라, 교양을 더 쌓아야 했던 것이다!
 또한 아무도 못 알아챌 수도 있는 작은 실수를 교정하고자 반복해서 연주를 녹음했던 드럼 연주자 친구가 그랬듯이, 예술에는 관(람)객이 포착하지 못한 것마저도 온전히 하려는 자기 수양의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예술은 자기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미덕을 칭송한다. 예술이란 때로는 아주 사적인 것이다. 간혹 공감도 안되고, 허영과도 결합하는게 예술이다.


3. 가끔은 사진이나 미술은 부자들의 돈 놀음, 허영과 과시로 배를 불리는 예술이 아닌가 싶다. 음악은 좋은 곡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기록하고 복사할 수 있고,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다. 복사품이라고 해도 음질만 좋으면 충분히 곡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합법적인 절차만 밟았다면) 명곡은 수없이 복사되어도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 같다.
 그런데 미술이나 사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고흐의 작품을 완벽하게 복제해도, 그 그림은 헐값에 팔린다. 반면, 고흐가 그린 원작은 상상할 수도 없는 거액에 팔린다. 내가 보기엔 복제품이라고 해도 충분히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대체 왜 가격은 그렇게도 차이가 난단 말인가.
 원작에 붙는 막대한 프리미엄은 그것이 더 예술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희귀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나로선 명망있는 사진이나 미술은 사치품으로 생각되고, 정서적인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미술관 큐레이터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더라. 배가 불러야 예술을 찾는 법이고, 예술은 당연히 옛날부터 권력과 돈을 좇아 왔다고. 음악도 희귀 음반 수집과 같은 사치시장이 존재한다고. 맞는 말이다. 아이돌 상품을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수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가, 음악이 사진이나 미술보다 자본에 덜 종속적이라고 주장하기는 힘들겠다.

 김영일 작가의 사진전이 하필 명품 중의 명품 에르메스의 매장에서 열린 것도, 실리적으론 좋은 선택이다. 사진전도, 국악음악도 부유층을 통해 전파되었을 때 그 파급력도 클 수 있고, 보통 사람들 사이의 평판도 좋아지는 법이다.


4. 공연은 가야금 연주였는데, '성금연류 긴 산조'라는 것이다. 김영일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산조 연주는 연주자가 평생에 딱 한 곡만 완성하게끔 되어있다. 또 서양음악과는 달리 반복되는 중심테마가 없는 것이 특징. 성금연류란 성금연이라는 선배 연주자의 유파(流派)라는 의미라고 한다. 제자가 선배를 선택하게 되어있어서, 제자가 선배의 음악을 존중할 수 없으면 그 이름을 물려받지 않는다고. 후대에 냉정하게 평가받는 음악이라니 살벌하기도 하고, 음악을 대하는 장인정신이 느껴졌다.
 국악연주를 집중해서 들은게 얼마만인가 싶다. 불협화음처럼 들리는 멜로디 진행이 자주 들려서 신기했고, 박자도 자주 바뀌는 변화무쌍한 곡이더라. 반복되는 테마도 발견하기 힘들고, 흐름을 알 수 없다보니 즉흥연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랫만에 들어도 역시나 잘 모르겠고 어려웠지만 재미있게 감상했다.


5. 사진전에 온 부유층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남녀할 것없이 멋쟁이들뿐이더라. 개인적으로 남자가 패션모델처럼 잘입는 것은 '선을 넘은' 것처럼 생각되어서, 감상은 할 지언정 지향하지는 않는데, 다들 내 기준에서는 '선을 넘은' 멋쟁이들이었다. 양말까지도 범상치가 않더라.
 실내에서도 굳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던 내 또래 관람객도 눈에 띄었는데, 이런 분들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자유주의자의 양심



 Paul Krugman의 뉴욕타임즈 칼럼 제목은 이 책의 원제와 같은 'the conscience of a liberal'이다. 이 책은 2007년도에 발행되었으나, 국내에는 2012년에 비로소 '새로운 미래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새로운 미래를 말하다'는 진보주의 정신이 가득한 책이다. 논리정연하게 미국의 경제, 정치, 사회가 겪어온 변화를 말하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분석한다.
 현재 미국 경제와 정치의 발전상을 기록하면 두 개의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 경제 그래프는 심했던 소득 격차가 어느 정도 줄었다가 다시 심하게 벌어짐을 보여준다. 정치 그래프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극화가 심해졌다가 초당적 제휴의 기미가 보이더니 다시 양극화가 초래된 모양새다. 결국 오늘날 미국은 1920년대 대공황(great depression)이전 만큼이나 정치,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이렇게 경제, 정치 그래프가 평행을 이루어 '춤'을 추는 원인은 무엇일까? 가능한 대답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경제적 불평등이 춤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기술 발달과 세계화로 소득 격차가 자연히 심화되었고, 계층 간 격차의 확대가 정치적 양극화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양극화가 주도한다는 것이다. 강력해진 우파 세력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평등을 심화했다.
 Krugman은 이 가운데 두 번째 대답이 정답이라고 말한다. 이의 근거로 4가지를 들고 있다.
1) 우선 불평등이 극심했던 도금 시대(gilded age)에서 비교적 평등한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시대로의 변환은 결코 점진적이지 않았다. 계층 간 격차는 불과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학자들은 이 시기를 대압착(great compression)이라고 부른다.
2) 최근 미국에서 불평등이 확대된 것은 1980년대부터인데, 1970년대부터 보수주의 운동이 일었고, 우파가 공화당을 차지했다. 즉, 정치적 양극화가 우선했고, 경제적 불평등이 그 뒤를 따랐다는 것이다.
3) 기술 발달이 고학력 노동자의 수요를 늘리고, 저학력 노동자의 수요를 줄여서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실제 고학력 미국인들 대부분의 수입은 증가하지 않았고, 극소수 엘리트 집단의 수입만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와 규범, 정치적 환경이 시장의 힘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4) 기술 발달과 세계화가 원인었다면 모든 선진국에 영향을 주었어야 옳다. 그런데 미국만큼 불평등이 증가한 선진국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치적으로도 선진국 가운데 미국만큼 우파로 돌아선 국가는 드문 것이다.

 Krugman은 더 나아가, 정치적 보수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인종주의를 들고 있으며,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무엇보다 의료보험체계를 개혁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 obamacare로 어느정도 이 과제는 실현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정치, 경제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엿보는 것은 학창시절 역사 수업을 듣는 것처럼 재미있지만,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어떻게 살지 판단하는데에도 도움을 준다. 우리에게 인종차별과 냉전, 테러는 없지만, 대신 북한이 존재하고, 반미와 친일이 존재하며,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시장이 불평등을 심화했고, 극소수 엘리트들은 능력에 걸맞는 부를 보상받았을 뿐이라는 말은, 책임은 회피하고, 영광과 혜택은 누리려는 거짓된 주장이다.
 합리적인 진보주의자로서 객관적인 증거와 논리적인 분석을 확보하려면 읽어볼만한 책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역사를 굉장히 좋아하는 소년이었는데, 보편적인 고교과정을 밟지 않다보니,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내 지식은 굉장히 얕다. 좋은 한국 근현대사 저서를 추천해달라고 페이스북에 적었더니 강만길, 박태균, 강준만 등의 책이 추천되더라. 읽어봐야지 싶네.

2013년 2월 9일 토요일

알면 알수록



1. 나는 지인들 사이에서는 뭔가 당연히 '알 법한' 것들을 잘 모르기로 조금 명성이 높다. 가령 작년에야 비로소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가 무엇인지 알았고, 청와대가 광화문 근처에 있다는걸 알았다. (전에는 국회의사당 근처에 있겠거니 했다) 레 미제라블의 내용도 장발장이 빵을 훔쳐서 감옥에 간다는 것밖에 몰랐다. 그 밖에 도서관 에티켓을 전혀 모른다거나 아무튼 여러가지 몰랐던 것들이 많지만, 최근에 새로이 알게 된 것들 중 가장 흥미로운 게 바로 패션이다.
 이십대 후반이 되도록 중고등학교 시절에 산 옷이나, 형이 산 옷을 같이 입고 살았다. 그런데 지인들이 패션에 워낙 관심이 많아서 최근 백화점을 자주 드나들며, 이런저런 훈육(?)을 받아서 많이 배웠다. 적당한 소비습관만 뒷받침된다면 이런 관심사도 삶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위 드라마같은 경우에도, 오랫만에 틀어보니 전에는 안 보이던 배우들의 패션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 다들 참 옷을 잘도 입는다.

 옷에 전보다 관심을 가지게 되니 길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을 보아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사람들의 새로운 면모, 감춰진 개성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옷은 그 사람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주기도 한다. Malcolm Gladwell도 저서 '블링크'에서 비슷한 말을 하더라. 때로는 어떤 사람을 알려면 일주일에 2번씩 가지는 식사보다, 30분 간 그 사람의 방을 엿보는게 더 효과적이라고. 방에 온통 아웃도어 브랜드의 옷들이 널부러져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활동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정리정돈은 서툰 사람일거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의 바지 끝단과 소매 끝단이 아주 잘 맞고, 구두가 늘 깨끗이 닦여있다면? 그 사람을 알아채는데 의례적인 대화보다 몇 배는 정확한 정보가 아닌가.
 문득 미술이나 건축에 대한 조예가 깊은 친구를 사귀고 싶다. 주변에 없고, 나 자신도 그다지 아는 바가 없는데, 아마 내가 모르는 정보와 새로운 시각을 많이 제공해주지 않을까?

2. 아는만큼 보인다. 패션이야 요즘에 조금 배웠지만, 음악은 전부터 남보다 풍부하게 즐겨온 분야이다. 많은 음악을 듣기도 했지만, 밴드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또 다른 관점과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우선 악기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고, 연주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앙상블을 듣는 감각이 있다. 이건 어느 한 악기만 홀로 연주해온, 합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감각이다. 아무튼 이런 드문 경험이 음악을 보다 입체적으로, 생생히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듣는 취향이 밴드구성의 음악에 쏠리는 건 단점같기도 하네.

 어쨌든 스타벅스는 Steely Dan과 Donald Fagen의 재즈록을 주구장창 틀어대고, 얼마 전 삼성동 현대백화점에선 Lee Ritenour의 Bahia Funk가 들리더라. 엊그제 한 카페에선 Bill Withers의 Lovely Day가 흘러나왔다. 아, 그리고 방송에서 소개하는 음악들을 보면 김구라는 진정한 메탈빠임이 틀림없다.

 이런 소소한 것들도 분명 내가 음악을 들어온 덕분에 알아채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이십대를 돌이켜보면, 밴드활동에 퍼부은 시간만큼 쓸데없이 낭비한 시간도 없는 것 같다. 참, 뭔 짓을 그리 했나 싶다. 스물세살 때였던 거 같은데, 덧없다는 느낌에 대한 고민을 늘어놓았더니
한 선배가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값진거야.'라는 말을 해줬었다. 참 맞는 말이다. 시간 낭비를 더 마음껏 하려고 고생도 하며 사는 거 아니겠어. 그 선배는 대학을 졸업하고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뭐할까 문득 궁금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용기있는 사람이다 싶네.

 이번 포스팅도 별로 쓸모가 없으니, 좋은 음악이라도 담자. Steely Dan의 재즈록 넘버 'Kid Charlemagne'.

2013년 2월 3일 일요일

아버지의 그림



 
1-1. 미국 경제는 이런저런 위기를 헤쳐나오고 있는 중. 작년 4분기 경제지표는 안좋았지만, 속 내용을 보면 나쁘지 않다. 경제성장률이 무려 마이너스(-)로 돌아섰지만 정부 지출 삭감과 기업 재고의 감소가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평. 오히려 미국의 주가는 훨훨 날아서 금융위기 이전의 고점을 완전히 회복했는데 이것이 미래 성장에 대한 선반영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1-2. 지난 한 달간 무엇보다 재미있던 미국 경제의 이슈는 백금 통화 발행 소동이다. 공화당의 반대에 맞서 정부 적자 문제를 해소하려는 기발한 꼼수였다. 짧게 정리된 기사는 이것. 꽤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다른 타협안을 찾기로 하면서 무산되었다.
 공화당 측에서는 백금 통화를 발행하면 금리가 오르고 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저 주장이 맞다면 애초에 미국이 양적 완화를 할 때에도 이미 금리인상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것이다. 침체된 경제상황에서 금리는 신뢰이다. 풍부한 통화 공급에 신뢰가 깨지지 않았다면, 백금 통화도 다르지 않다. 인플레이션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미국 경제가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그' 인플레이션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단 하나, 연방 은행의 독립성 훼손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1) 백금 통화 발행이 특별 조치이고, 2) 독립성이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든 훼손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연방 은행의 독립성이라고 여긴다.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이슈일 뿐이다. 게으른 블로거라..


2-1. 'BBK의 배신'에서 저자 김경준은 정당정치가 사회적 진보/보수와 경제적 진보/보수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싶더라.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미국과는 상당히 다르다. 미국의 공화당과 비교하면 새누리당도 민주당도 경제적으로 진보적이고, 미국의 민주당과 비교하면 새누리당도 민주당도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것 같다.
 최근의 정황을 바라보면, 박근혜의 새 정부는 증세보단 국채발행, 직접세보단 간접세, 법인세보단 개인세, 공공고용보단 공공지출을 선호하는 것같다. 정치적으론 더 노련할지언정 경제적으론 더 인기영합적인 노선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새로이 중소기업에 포커스를 맞추고는 있지만 여전히 정책 성격이 기업친화적이라, 그간 우리나라 경제에서 진행되어 온 기업과 가계의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기에 충분할까 의문이 든다.
 어쨌든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기대보다 언더퍼폼하고 있고, 원화의 엔화대비 평가절상과 뱅가드 펀드의 벤치마크 변경이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뱅가드 펀드 이야기는 이 기사를 링크한다. 뱅가드 펀드의 효과를 주식시장의 잡음(noise) 정도라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매도될 주식규모가 한화 약 10조원 규모라는데 잡음이라기엔 너무 크다. 매도기간이 7월까지라던데.
 IT주식은 달러 대비 원화도 나쁘지 않고, 시장경쟁력도 환율의존적이지 않다는 분석이고, 자동차는 엔화 대비 원화가 경쟁력에 중요한 요인이라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
 나는 자동차 대장주, 모바일 게임주에 긍정적이고 7월보다 앞서 우상향이 진행되리라 기대한다. 전문가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런 소리 여기다 써도 괜찮다. 하하.

2-2. 대학의 등록금 인상을 대학 간의 치열해진 경쟁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지만 정확한 분석같지 않다.  지난 몇 년간 등록금은 지나치게 많이 올랐고, 명문대와 지방대의 등록금은 거의 차이가 없다. 경쟁이 치열해진 것은 대학이 아니다. 바로 대학생들이다. 낮은 고용률, 임금, 지나친 집값, 지나친 매몰 비용(학비, 교육기간)이 모두 경쟁을 심화했다.
 가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등록금 인하와, 대학에 대한 수요를 줄이기 위한 고용 해법이 동시에 필요한 이유다.

1) 등록금 인하를 위해서 대학에 직접 지원하는 방식의 정책은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반면, 사학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막기 힘들다. 미국식 기부제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춰볼 때 실현이 힘들고, 효과가 적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명문대는 수가 아주 적고, 요즘과 같은 과잉 수요 상황에서 대학간 경쟁으로 등록금을 인하하는 것은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졸업 후에 등록금을 상환하는 등록금 후불제가 가장 낫다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대학에 대한 수요를 줄여야만 등록금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나는 기업에 고졸 사원 고용을 할당하는 방식의 규제가 우리 경제에 아주 좋은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의 교육프로그램 개발을 유도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학력 인플레에 좋은 해법이 된다. 등록금 인하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대졸이하 사원의 임금이 하락하는 부작용이 우려되므로, 풍부한 일자리가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고용도 문제지만, 매몰 비용에 비해 적은 임금도 가계의 생산성을 저하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임금이란 기업이 수요-공급에 맞춰 책정하는 것으로서 시장에 맡기는 것이 사실은 옳다. 그보다는 여러가지로 매몰 비용을 줄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3. 사진의 그림은 아버지가 그린 작품이다. 어릴 적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다는 아버지는, 공무원을 퇴직하신 뒤에 한동안 그림을 배우셨고, 좋은 그림을 많이 그리셨다. 다른 그림들도 가끔 블로그에 올려야지 싶네. 개인적으로 이 그림은 배경과 꽃의 이질감이 참 매력적이다.

 지난 한 달간 2권의 새 책을 읽었고, 9권의 책을 다시 읽었다. 참 신기한게, 마치 새 책을 읽는 것처럼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책들도, 막상 읽는 속도도 빠르고, 이해도 빠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내 뇌가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나보다. 요즘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서, 다양한 생각들이 블로그에 옮겨지기 전에 (적어도 내 의식 속에서는) 사라져버린다. 곧  치과 공부를 위해서 태블릿 PC를 구입할 생각인데,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

2013년 2월 1일 금요일

은영전 한정판 구매


 은하영웅전설 전집 한정판을 구매했다. 중학교 시절 동네 영풍문고였나 그 안에서 우연히 한 토막을 읽고는 너무 재미있어서 매일같이 찾아가 조금씩 읽었다. 부모님께 사달라고 하다가 단칼에 거절당한 뒤로는 더 자주 찾아가서 읽었고, 결국 얼마 안 있어서 본편 10권에 외전 4권까지 모조리 읽었다. 그 뒤론 다른 사내놈들처럼 은하영웅전설 게임도 했고, 대학시절엔 드디어 텍스트 파일을 다시 읽기도 했다. 결국 중학교 시절부터 소장하고 싶었던 작품을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손에 넣은 셈이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의 양 웬리라는 인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주 인간적이면서, 또 아주 지적인 인물인데 참 복잡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불필요한 규율, 권위를 싫어하는 점이 좋았고, 솔직하고 다소 서툰 사교방식과, 허술한 일상의 면모도 좋았다. 그 모든 걸 참 닮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도, 만화 H2의 주인공 히로도 좋았다. 둘다 자유롭고, 반항적이다. 둘다 참 닮고 싶었던 인물인데, 이들 사이의 공통점도 많다. 그건 성인이 된 뒤로 나의 영웅이 된 버트런드 러셀도 마찬가지다.
 참 재미있게도 최근까지 버트런드 러셀이 '나는 신념이란 말을 싫어한다.'라는 말을 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은하영웅전설에서 양 웬리가 한 말이더라. 이렇게 헷갈려할 정도로 둘은 (적어도 내 마음 속에서는) 닮았다. 아, 그리고 물론 나도 신념이란 말을 경계한다.

 언젠가 이들이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인지, 단지 내 기질이 이들을 선호한 것인지 궁금하더라. 처음부터 양 웬리보다 라인하르트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히로보다 히데오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양 웬리도, 히로도 두 작품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린 인물이니까 내 취향이 대단히 특별한 건 또 아닌 것 같네.

 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에는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인물에 열광하는데, 나이가 들면 좀 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인물을 선호하게 된다고 하더라. 난 아직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인물이 더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반핵 반전 시위하다가 투옥되곤 했던 버트런드 러셀을 보면, 나이를 먹더라도 전투력을 잃지않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영양가없는 이야기로 포스팅을 하게 되네. 어쨌든 은하영웅전설의 구매는 감격스러운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