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9일 수요일

현대판 마이더스 왕


 마이더스 왕은 고대 신화에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무엇이든 손만 대면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얻은 뒤 처음엔 기뻐했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딸 마저 황금으로 변해버리자 그 마법의 잔혹성을 깨닫는다. 고대 신화에서 마이더스 왕은 탐욕의 위험을 우리에게 알려주지만, 현대에선 그 교훈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경제학에서 마이더스 왕은 금본위제의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사실 '화폐전쟁'과 같은 베스트셀러 덕분에 금본위제는 나에게 퍽 흥미로운 소재였다. 나는 그 책의 내용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는데, 최근 미국 내에서 공화당이 이 소재를 다시 들고 온 덕분에 나의 생각을 지지하는 좋은 데이터와 논의를 찾아볼 수 있었다.

 금본위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화폐를 가치가 일정한 실물 자산에 연동시킴으로써 통화의 가격 변동을 줄일 수 있고, 이것이 경제를 안정시킨다고 주장한다.
 위 주장이 타당하려면 1) 금의 가치와 양이 실제로 일정해야만 하고, 2) 통화의 안정이 경제에 실제로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1)에 대하여, Paul Krugman의 블로그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CPI에 대한 금의 가격을 본 그래프인데, 금의 가격 변동폭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The Atlantic이라는 잡지의 편집자인 Matthew O'Brien가 쓴 칼럼을 보자. 금본위제 시절의 물가변동폭이 확장적 통화정책을 취하고 있는 2008년도 이후에 비해서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Krugman이 보여준 금의 가격 변동폭은 두 가지 시장의 특성에 기인하는데, 상품 투자 시장과 각종 산업 시장이 그것이다. 상품 투자 시장에서 금은 경기가 침체되거나, 시장 금리가 인하되면 그 가격이 오른다. 또한 금은 공업, 의류, 치과(!) 등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이용되는 상품으로 각 산업의 수요측 압력을 받으며, 광산에서 채취되는 원자재로서 공급측 압력을 받아 그 가격이 변한다.
 Krugman은 오늘날과 같은 경기 침체 상황에서 통화 가치가 금과 연동되어 있다면 엄청난 디플레이션을 가져왔을거라고 말한다. 글쎄, 맞는 말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높은 금 가격은 금이 '안전 자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조각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 수요가 금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통화 가치가 금과 연동되어 있다면, 경기가 침체되거나 시장 금리가 인하된다고 금에 수요가 지금과 같이 몰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금의 가격 변동폭이 다른 원자재보다 유별났던 데에는 분명히 확장적 통화정책의 영향이 어느정도 있다. 그러므로 디플레이션이 온다는 것은 타당하지만, 지금의 가격을 산술적으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
 두 번째로 Matthew O'Brien은 금본위제 시절 물가변동폭이 더 컸던 것은 무역 수지와 금의 비축량이 직접적으로 물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금의 가격와 양이 실제로는 그다지 안정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확장적 통화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비판하는 공화당이, 이러한 증거 앞에서도 금본위제를 주장하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2)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통화의 안정이 경제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가? 물론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Krugman은 저서 '불황의 경제학'에서 한 국가가 채택할 수 있는 통화정책을 3가지로 나눈다. 변동환율제, 고정환율제, 자본규제시장이 그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3가지다. 통화재량권 획득, 환율의 안정, 자유로운 거래. 하지만 우리는 이들 중 2가지 이상을 결코 얻을 수 없다. 변동환율제는 환율의 안정을 포기한다. 고정환율제는 통화재량권을 포기한다. 자본규제시장은 자유로운 거래를 포기한다.

 이 중에 고정환율제의 대표적인 예로 지금의 유로존을 들 수 있다. 지금의 유로존이 채택한 고정환율제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거칠게 말해서 국소적인 수급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과거 포스팅을 링크한다.
 금본위제는 고정환율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화폐전쟁'이 주장하듯, 유로존도 감당하지 못한 고정환율제를 전 세계로 확대한다? 끔찍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공화당이 주장하듯 미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것은? 아니 대체 왜 미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해야만 하나? 우선 Krugman이 주장하듯, 금본위제를 채택하면 디플레이션이 올 것이다. 이는 지금의 경기 침체를 공황으로까지 악화시킬 수 있다. 또한 미국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전세계에 전가할 수 있는 기축통화국이다. Matthew O'Brien의 칼럼이 보여주듯, 양적 완화 직후 안정적인 물가변동폭을 유지해온 미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금본위제는 낡은 소재이다. Keynes가 말했듯 'barbarous relic'인 것이다.

 거시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는 시간이 무척 오래걸린다. 전문 분야가 아니고, 아직까지 생각의 깊이도 부족한가보다. 두 번째 태풍 덕에 날씨가 우중충하다. 이제 밖에 나가서 운동하고 책도 읽어야지.

2012년 8월 25일 토요일

올해만 이렇게 더운걸까?

 8월의 날씨는 정말이지 너무 더웠다. 내 짧은 인생에서 유래없이 더운 한 해였는데, 매년 우리나라가 더워지는 것 같고, 4계절이 2계절(여름,겨울)로 바뀌는 것만 같아서 걱정스럽다. 이 모든 것이 지구의 온난화 현상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정말 그런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최근 1) Paul Krugman과 2) Jeffrey D. Sachs의 지구온난화에 대한 칼럼이 있었다. 올해 미국의 기록적인 가뭄에 대한 포스팅이었는데, 이들은 온난화 현상을 분명한 추세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Krugman은 평균 온도의 상승보다 그 변동폭에 주목하여, 그 진폭이 커져감은 명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인 데이터는 그의 블로그에 posting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슈퍼괴짜경제학'의 Steven Levitt과 사뭇 다른 것이다. Steven Levitt은 저서에서 지구 온난화 현상은 장기적인 기후 변화의 noise일 가능성이 높으며, 특히 이에 이산화탄소가 미치는 영향은 과장되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미 온실효과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개발되었으나, 탄소배출권 등과 관련된 국가 간, 혹은 자국 내의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이의 공론화가 가로막히고 있다고 언급한다.

 탄소배출권은 국가 간, 혹은 기업 간에 탄소배출권을 상품처럼 경쟁하여 구입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효성 면에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탄소배출권을 과거의 탄소배출량에 근거하여 구입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의 탄소배출량에 근거하여 구입하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과거의 탄소배출량을 근거로 하면 미국이 가장 많은 배출권을 구입해야만 하고, 미래의 탄소배출량을 근거로 하면 물론 중국이 가장 많은 배출권을 구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간의 반목이 생기고 국제적으로 이 시스템이 정착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침 오늘자 뉴욕타임즈 칼럼에서 코넬대 교수 Robert H. Frank가 탄소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탄소세는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출된 탄소에 근거하여 국가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저자는 탄소세를 이번 대선의 쟁점 중 하나로 이야기하면서 이를 통해 전세계적인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 외에도 두 가지 장점이 있다고 말하는데 1) 추가 세수가 확보되므로 정부의 예산 균형을 확보하는데 이롭다는 점과 2) 단계적 탄소세 도입을 통해 (특히 대체 에너지 관련) 산업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논의거리이다.
 이 제도의 어려움은 역시나 국제화다. 저자는 탄소세가 책정되지 않은 타국의 상품이 자국 내로 들어왔을 때 세금을 부과할 수 있고, 이들은 미국이라는 큰 시장을 저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탄소세를 책정하지 않은 국가와의 교역에 관한 한 일종의 '보호무역'을 채택하자는 이야기다.
 국제적인 공조를 요구하는 탄소배출권 제도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 국가마다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탄소세가 더욱 효과적으로 탄소배출량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깐, 하지만 탄소배출이 정말 온난화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는걸까? 아니 온난화가 일어나고 있기는 한건가? 미국 정부와 경제학 교수들, 언론이 동조하여 재정 적자를 만회하기 위한 증세 방안을 개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세상에 어두컴컴한 음모가 가득한 것 같다.

p.s : 최근 미국의 가뭄은 전세계적인 곡물값 인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옥수수값 폭등이 심각한데, 우습게도 미국은 옥수수를 이용한 에탄올 대체 에너지를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이다. 자국 법으로 전체 옥수수 생산량의 40%를 대체 에너지 개발에 사용하라고 규정해놨다고 하니, 미래에 식량 파동이 닥칠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로서는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내가 생각하는 독서법



 오늘 말콤 글래드웰의 '티핑 포인트'를 다 읽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New Yorker 칼럼니스트인데 그의 몇몇 글들을 지인들을 통해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좋은 안목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많은 기대를 하고 책을 읽었는데, 기대에 비하면 내용이 평범한 것 같다. 하지만 기억해두면 좋을 법한 풍부한 사례를 접할 수 있었다. 기억해두자.

1. 올해도 여러가지 독서를 해왔다. 새로 읽은 책을 정리해보면,

사랑의 추구와 발견/파트리크 쥐스킨트 저/강명순 역/열린책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파트리크 쥐스킨트 저/강명순 역/열린책들
나쁜 사마리아 인들/장하준 저/이순희 역/부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저/부키
티몬이 간다/유민주 저/이콘
러셀의 철학노트/페인버그, 카스릴스 저/최혁 역/범우사
사랑의 기술/에리히 프롬 저 /황문수 역/문예출판사
사랑예찬/알랭 바디우 저 /조재룡 역/길
티핑 포인트/말콤 글래드웰 저/임옥희 역/21세기 북스

 올해 안에 읽을 계획인 새 책은 아래와 같다.

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저/차경아 역/까치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저/홍영남, 이상임 옮김/을유문화사
파시즘의 대중심리/빌헬름 라이히 저/황선길 역/그린비
투자전쟁/바턴 빅스 저/이경식 역/휴먼앤북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토드 부크홀츠 저/이승환 역/김영사

 다 합해봐야 14권 정도이니 1년 치 독서로서 많은 양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외에도 늘 그랬듯이 읽은 책을 다시 읽는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 저/송은경 역/사회평론
프로타고라스/플라톤 저/최현 역/범우문고

를 다시 읽었고, 다음의 책들을 다시 읽을 계획이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파트리크 쥐스킨트 저/강명순 역/열린책들
사랑의 기술/에리히 프롬 저 /황문수 역/문예출판사
사랑예찬/알랭 바디우 저 /조재룡 역/길
행동경제학/도모노 노리오 저/이명희 역/지형


2. 개인적으로 티비에 나와서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들이 일년에 책을 100권 읽느니 하는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면 속된 말로 손발이 오그라든다. 계산된 자기PR이나 본능적인 허세같고(둘 다 연예인의 덕목이다), 실제로 100권을 읽었다면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년에 100권을 읽는 방식의 독서는 아주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단순 계산으로도 한 주에 약 2권의 책을 읽어야만 하고, 페이지 수도 어마어마할텐데, 그렇게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서 책의 요지를 파악하고, 정보를 기억할 수 있을까? 독서 외에 다른 활동이 없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라고 해도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좋은 책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겠지만 대체로 좋은 책은 빨리 읽어서는 안된다. 가령 올해 읽은 책들 중 가장 나를 사로잡은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의 경우, 예술, 사랑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는 풍부한 심상의 에세이와 극본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자주 책읽기를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내용을 읽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앞의 내용을 다시 읽기도 했다. 중간중간 멈추지 않고서는 그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가 없었고, 앞의 내용을 다시 읽지 않으면 종합적인 이해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게 읽지 않으면 그 내용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그 내용은 벌써 까맣게 잊혀졌다. 인간은 정말 망각의 동물인 것이다! 그나마 극본과 에세이였기에 망정이지, 정보를 주는 책이었다면 반드시 다시 읽어야만 한다. 심지어 나는 이 책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다. 책이 던져준 어려운 고민거리들을 다시 검토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책을 다시 읽는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책의 새로운 면을 일깨워주기도 하고, 같은 내용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러셀의 '현대판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에세이는 경제 지식이 쌓인 뒤에 다시 읽었을 때 처음에 읽었던 것과 전혀 다른 글이 되어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독서법은 천천히, 여러번 읽는 것이다. 핵심을 요약하고, 기록해두는 것이다. 가능하면 기록을 다시 보고, 잊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10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것이 일년에 100권을 읽는 것보다 몇 배는 나은 독서법이라고 생각한다.

2012년 8월 14일 화요일

나의 원(願)은 무엇인가.


 오늘은 미친듯이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집에 이대로 갇혀있기보다는, 밖에 나서서 뭐라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친하게 지내는 대학원 동기 누님이 계시다. 누님과 교류하면서 얻은 소득이 참 많지만 그 중에 으뜸은 아마도 블로그 문화를 배운 것이 아닐까싶다. 전에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이렇게 풍부한 깊이와 넓이로 나누는 장소가 있는지 몰랐다.
 캐주얼하게 다니는 한 블로그의 주인장이 블로그를 연지 6년이 되었다며 '그대의 원(願)을 세우라'고 말했다. 어려울 것도 없고 거창할 필요도 없고, 아주 솔직하게. 열 자 정도의 짧은 글로 지어보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나는 무언가를 추구해왔다. 그것은 계속 변했지만, 또 항상 비슷한 무엇이기도 했다. 가끔은 너무 막연하다가 또 아주 또렷해지기도 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말년에 쓰여진 자서전에서 자신의 인생을 지배한 세 가지 열정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사랑에의 열망, 지식의 탐구,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연민'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인간 버트런드 러셀을 사랑 속에, 지식 속에, 세상 속에 뛰어들게 하였다. 나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고민하게 되는 것을 4가지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은 무엇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의 원(願)을 달성할 것인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주로 앞의 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왔다. 내 삶의 다양한 궤적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많은 책들을 통해서. 내가 찾게 된 해답들은 물론 완전하지 않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운 과정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더러는 의기양양하다가, 더러는 좌절하고, 더러는 반항하면서 맞서 싸우고 있는 가장 강력한 적은 마지막 질문, 바로 저 놈이다.

 블로그에 좀 더 나를 개방해야지 싶다. 이곳이 좀 더 나에게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2012년 8월 4일 토요일

사랑의 기술

 책의 영어 제목은 'the art of loving'인 반면, 우리말 제목은 '사랑의 기술'이다. 물론 저자는 책의 도입부터 사랑이란 '사건'이 아니라 배우고 노력해야만 하는  '기술'이라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을 보니 이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조금 있어보인다. 내 마음대로 바꾸자면, '사랑의 이해'가 더 나은 제목이 아닐까? 혹은 기술을 technic 즉 技術이 아닌, description 혹은 記述로 표현해야만 보다 내용에 걸맞을 것 같다.
 책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독일에서 사회학, 심리학,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강의를 한 학자인데, 다양한 학문적 기반이 실제로 책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 같다. 저자는 통념과는 달리, 사랑은 방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사랑의 뿌리가 인간의 근본적인 분리감에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 같다.
 분리감의 극복을 위해 인간은 몇 가지 방법을 취한다. 과거에는 성애가 결합된 집단 의식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 (지금도 종교나 단체 운동, 공연 등에 이 전통이 남아있다) 이는 강렬하지만 너무 짧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사람간에 인간 관계를 이루고, 집단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는 지속적이지만 충분치 못할 때가 많다. 그 외 창조적인 활동이 있는데, 이는 모두가 누리기 힘들고 사람 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사랑은 충분히 강력하면서 육체와 정신이 함께 연관되어 있고 지속적인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스피노자는 '행동'과 '격정'을 구별해서 전자는 능동적 활동으로, 후자는 수동적 활동으로 정의한다. 능동적 활동에서 인간은 자유롭지만, 수동적 활동에서 인간은 쫓기는 노예상태가 된다. 저자는 사랑은 능동적 활동이 되어야만 하고, 이로부터 '받는 사랑'에서 '주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처음 태어나면 어머니로 대표되는 '받는 사랑'에 열중한다. 차츰 성장하면서 인간은 타인을 배우고, 남에게 애정을 구하는 단계를 거쳐서, '주는 사랑'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성장 단계를 고찰해보아도 '주는 사랑'은 '받는 사랑'보다 성숙한 경지이고, 보다 가치있는 것이다.
 이후로 저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무조건적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조건적 사랑으로 정의하고, 인간은 성장하면서 두 가지를 차례로 경험하며,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라 말한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본인의 각종 정신병에 대한 임상적인 경험을 해석하고 있다.

 글쎄, 나는 저자가 여기서 부모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 같다. 아버지의 사랑이 저 정도로 어머니의 사랑과 대조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만 이후로 보다 확대된 인간관계에서 맺어지는 조건적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을 연결하는 역할 정도를 하지 않나 싶다.
 또 저자는 양성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동성애는 근본적인 실패라고 단정하고 있지만, 동성애자들의 뇌 구조에 대한 최근의 연구결과를 보면 저들의 사랑이 근본적인 실패라고까지 평가받을 건 아닌 거 같다. 그 밖에도 수치심에 대한 분석 등에 의아한 점이 있으나 이만 패스..

 하지만 인간이 가지는 분리감이 모든 인간활동의 씨앗이 된다는 분석은 참 적절한 것 같다. 또 사랑의 능동적 요소로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을 드는 것도 그렇고, '받는 사랑'에서 '주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사랑의 성숙과정을 해석하는 것도 깊이 공감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좋은 것과 나쁜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인간이 자신을 벗어나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만들어지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회 관계에서 그 내용이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점에서도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높은 수준의 가치라는 설명은 타당한 것 같다.
 그리고 '주는 사랑'을 통해서 '받는 사랑'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아주 냉정하지만 참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몽상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내려야 하고 치열히 달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를 비롯하여, 주위를 돌아보면 '받는 사랑'을 추구하는 것에 머물러서 자신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이다. 인간의 동물적 본능은 '받는 사랑'을 추구하기 쉽게 되어있다. 하지만 성숙한 사회생활에 요구되는 '주는 사랑'은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것이다.

 꽤 긴 시간동안 내가 안고 있는 고민이 있다. 여성이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남성보다 낮은 단계에 머무르기 쉽지 않나 하는 생각인데, 이번 독서도 이 고민을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생물학적인 분석에 의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개인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여전히 남성의 경제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결혼이 삶에 미치는 큰 영향력은 여성의 성숙을 방해한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부양받는 존재이고, 어린아이와 어른의 중간 단계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남자가 구애하고 여자가 받아들이는 문화적 전통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가 나에게 여성을 충분히 존중하기 어렵게 만들 때가 있다. 사회적 발달을 높이 평가하는 철학이 남성중심적인 건지도 모르지. 그러고보면 태어난 아기에게 여성이 느끼는 일체감과 무조건적인 사랑은 남성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경지이기도 하다. 삶의 진리는 나에게 여전히 쉽게 통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