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근황과 잡담


1. 11월은 꽤 다사다난했다. 결정적으로 치과개업을 하기에 좋은 자리를 발견하여, 임대계약을 할 뻔했는데, 아버님도 모셔온 자리에서 계약을 취소했다. 부동산 업자가 일방적으로 건물주에게 유리한 조건을 요구하고, 계속해서 탁자를 손으로 친다거나 윽박지르는 등 비정상적인 영업태도를 보이더라. 아무래도 이상해서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그제야 사실 그 건물의 소유주가 자신들이라고 실토했다.
 삼십대 중반의 동기들도 임대계약 때는 관련업계 지인이나 부모님과 동행한다더니, 강호의 험난함을 몸소 실감한 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공중보건의로 말년을 보내고 있는 지인들 모두 미래를 계획하느라 분주한 거 같더라. 선배들이 입을 모아서 공중보건의 시절만큼 좋은 시절이 없다고들 하던데, 나도 좋은 시절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다.


2. 대전에서 공부하다가 서울에 올라온 첫 해에 많이 느끼긴 했는데, 전라도와 경상도뿐만 아니라 서울 내에서도 지역을 놓고 이래저래 편을 가르고 계급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더라. 초등학교 때 일산에서 목동으로 전학을 왔는데 목동 출신이 아니라며 하대하는 친구들이 많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내가 다른 세상에서 살다왔나 싶기도 하다. 출신 고등학교를 따지는 사람들도 되게 많다는데,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노원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는데, 내가 눈치가 유난히 없었는지 몰라도 나는 지역이나 돈, 집안으로 편가르기를 하거나, 당한 기억이 없다. 내가 중산층이 대다수인 평범한 지역 출신이라 그런걸까?
 자연히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어느 지역에서 키워야하나 고민하게 된다. 참 별 웃기지도 않은 걸로 내 미래를 고민하게 되는구먼.


3. 이코노미스트 홍춘욱 님은 ‘김광진의 경제포커스’에 패널로 참석했던 이들 가운데 내가 좋아했던 분이다. 날카로운 분석력과 나긋나긋한 어투가 인상이 깊어서 이름을 기억한 몇 안되는 이들 가운데 한 분인데, 이분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더라. 더군다나 공짜로 읽기가 죄송스러울 만큼 아주 양질의 글들이 가득하다. 링크한다.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좋은 의견과 정보를 제공해주신다. 부동산, 환경, 인구변화, 그 외 여러 경제현황에 대한 글들이 있고, 논문, 도서에 대한 리뷰도 많다.
 아무래도 부동산과 같이 나랑 밀접한 주제의 글들을 먼저 유심히 읽게 되었는데, 부동산 시장이 폭락할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분석을 하셨다.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1) 우선은 우리나라는 부동산 대출이 변동금리 위주이므로 경기가 어려울 때 이자부담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점을 든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에 우리와 비슷한 변동금리 모기지로 대출을 받은 영국과 호주는 금리인하 덕택에 주택시장이 폭락하지 않았고, 영국은 작년에 완만한 반등, 호주는 올해 사상 최고가를 갱신하는 등의 강세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현재 고점에서 일정 정도 하락한 후 횡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같은 이유로 해석할 수 있다.
 2) 둘째로 소득대비 주택가격 비율(PIR)을 살폈을 때, 한국의 서울은 9.4, 전국은 4.8로 높은 편이다. 허나 이는 주택가격의 수요 요소(소득)만을 고려한 것이다. 공급 요소, 즉 국토면적이 적어서 토지 공급가격이 비싼 특성을 고려하면 유사한 영국, 홍콩, 싱가포르 등과 비교했을 때 결코 높다고 볼 수 없다.
 이전과 다른 아주 흥미로운 분석이다. 허나 1)의 경우, 우리나라의 채권 금리가 미국의 금리 변동에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에 내년부터 예상대로 미국이 금리인상을 하면 부동산 대출의 이자부담이 급격히 증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점이 우리나라의 부동산 시장에 부정적인 요소로 생각된다.

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철학이 필요없다는 철학



 절친한 친구 한 명과 이따금 논쟁하곤 하는 주제가 있다. 이 친구는 모든 가치의 우열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일종의 회의주의인데, 이 친구는 원자화된 개인의 욕구가 끊임없이 충돌하지만, 결코 어떠한 보편성도 기반으로 확보될 수 없는 무질서한 곳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 친구에게는 살인도 죄가 아니다. 물론 죄라는 개념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합리가 비합리보다 우월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의무도 허구이다.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권리도 역시 허구라고 주장할 것이다)

 친구의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여지껏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의 주장 전부가 사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누구나 '존재한다.'는 것 이상의 정보를 확신할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수많은 감각정보에 의해 유추된 것이다. 개인이 직접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들은 이러한 감각들 뿐이다. 세상이 내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존재하고 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호접지몽에서 그러했듯, 내가 단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앞서 '흄의 철퇴'라는 블로그 포스팅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자극에 반응하고, 사고를 형성하는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험적 지식들은 결코 어떠한 확실성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서 개연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단지 그리 믿지 않으면 더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연역적 지식은 소급해 올라가면 궁극적인 출발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개연성과 같은 몇  가지 원리를 연역적 지식의 머리에 둔다. 우리가 사고를 형성하려면 몇 가지가 더 필요하다. 가령, 모순율이 그렇다. 또 'A=B이고 B=C이면 A=C이다.'와 같은 명제도 사실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 외에도 더 있지만 이만하자) 이러한 것들이 어째서 사실인지 더이상 따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들 원리들을 받아들여야 연역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방황하는 윤리'라는 포스팅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듯이, 많은 윤리문제들이 사실상 취향의 차이이다. 어떤 이는 사람을 죽이는 걸 좋아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법을 어기고 싶어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할 수 있다. 생득되는 윤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무'나 '권리'의 개념을 버리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단지 취향의 차이가 되어버린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참 재미있는 게, 하늘 아래에 새로운 게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2천년 전에 그리스에서 비슷한 주장을 한 철학자들이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의하면, 이 회의주의 철학은 아주 당연히 철학과 거리가 먼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게으른 사람들의 자기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철학이 필요없다는 걸 주장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친구는 일체의 보편성을 거부하고 원자적 개인에 머무르려 한다. 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그러한 욕구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선호를 타인에게 설명할 수는 있지만, 어떤 보편성에도 호소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욕구들이 사회 안에서 보편화되어 규율이 형성되는데, 그 자신은 일체의 규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절친한 지인에게 자신의 선호를  존중해줄 것을 부탁할 수 있다. 지인은 그를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일면식도 없던 살인마를 만나면 그는 단지 '저는 죽고싶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다. 결코 '살인을 하면 안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살인마는 그의 선호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세상만사에 대해서 '이것이 옳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 옳은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이것이 좋다.'라고만 말할 수 있다. 별난 결론이다.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주장은 단칼에 모든 고민을 해결해버리는 시원함이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면 그는 세상을  향해 어떠한 적극적인 주장도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양한 사회집단에게 단지 자신의 '선호'만을 호소한다면, 개인적 인간관계의 울타리 밖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들은 소극적으로 자기보호를 얻는 것에 만족한다.

 친구는 나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윤리의 기원에 대한 견해도, 인식론에 대한 견해도 큰 그림에서 유사하다. 그럼에도 아주 작은 관점의 차이에 의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취향의 차이가 회의주의를 낳고, 이 회의주의는 합리마저도 부정하기 때문에 설득될 수도 없다. 결국 개인이 가진 욕구만이 남으므로, 감정에의 호소가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역사를 보면 특정 시대의 정서가 특정 시대의 철학을 낳곤 한다. 개인의 정서도 그에 알맞은 철학관을 낳는다. 회의를 바탕으로 원자적 감정의 세계로 피신하는 개인이 품은 중심정서란 무엇일까. 나에게 이는 극복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이 또한 나의 취향임은 부정할 수 없다.

p.s : 사진은 이촌동 미타니야에서 먹은 카레라멘. 나는 일식 중 카레라멘이 제일 좋더라. 아.. 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