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8일 토요일

끄적이는 이야기



 남녀의 성적 매력은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데,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그 변곡점이 더 빠르고, 경사도 더 가파르다. 때문에 결혼적령기의 여성들은 세월의 변화에 아주 기민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적절한 남성을 만나기 힘들어진다.
 남녀의 사회적 위치를 피라미드로 그릴 때, 남성은 자신보다 피라미드의 낮은 곳에 위치한 여성들은 주로 선호한다. 반면 여성은 자신보다 높은 위치의 남성들에 대한 선호를 가지는 게 보통이다. 수요공급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피라미드의 높은 곳에 위치한 남성은 같은 위치의 여성보다 유리한 입장이 된다.

 작년 연말에 올해의 계획을 연애로 세웠던 기억이 난다. 제대로 연애를 했는가는 의문이지만 참 많은 이성을 만났다. 다양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삶과 가치관을 들었다. 나에게 사랑이 가지는 의미는 무얼까,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란 무얼까 헤아려보게 된다.

1. 과거 나는 짝사랑을 할 때 가장 열렬했다. 거절을 당하면 더 감정이 부풀어오르곤 했다. 돌이켜보면 시련을 넘어서는 큰 사랑의 모티브에 취했던 시절이었다. 사랑의 상대방은 실제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내 각본 안에 억지로 구겨넣어진 배역으로서 나에게 보여졌다.
 연애 시절도 다르지 않았다. 연애를 마친 뒤에야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고, 광기에 사로잡혔던 스스로에 크게 놀랐다. 최면에 걸렸던 것만 같더라.

 요즘의 나는 사랑에 조금 냉소적이다. 현실적인 조건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고, 조건이 맞는 것에 한하여 친구를 사귀듯이 편안하고 원만한 관계를 맺어가는게 사랑인 것 같다. 내 또래 많은 젊은이들이 나 정도의 사랑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도 안다. 이것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야위고, 메마른 사랑관이다.


2. 현실적인 조건에 집중해도 고민은 계속된다. 무엇이 좋은 조건일까. 어떤 성격이 좋은걸까, 어떤 직업이 좋은걸까, 나이대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부모님은 어떤 분이 좋을까.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도 순위란 매겨지지 않는다. 물론 위의 질문들이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성격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휴리스틱(heuristic)에 의지하게 된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상대는 없겠지.


3. 새벽에 잠에서 깨었다. 대단한 성찰이 나올 수 없는 주제이지만, 진짜 나의 이야기니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그대로 블로그에 끄적여보았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 나약함과 강인함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모두 다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가끔 라디오나, 티비 프로 등을 접하다 보면, 아내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이 나온다. 거기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함께 삶을 살아가며 만들어 낸 단단한 사랑을 본다. 문득 사랑이라는 게 신파극에 나오는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너도, 다른 누구라도 얻을 수 있는 게 사랑이다.

 어지러운 글이다.

p.s : 사진은 가로수길의 디 오리지날 팬케이크 하우스. 지인이 미국에 본점이 있는 괜찮은 체인이라며 데려갔던 곳이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환자 이야기


1. 어제는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를 보았다. 홍상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 건 저번 작품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부터인데, 한적한 상영관 안에서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키득거리며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영화였다.
 며칠 전부터 오른쪽 위 어금니가 시려왔는데, 영화를 본 뒤 점심을 먹을 때는 오른편으로 씹기가 힘들더라. 다행히 동기가 병원에 세미나 준비하러 출근했다길래 잠깐 들러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치아 옆면의 2차 충치. 4년 전 전공의 선생님한테 치료받은 기억이 있는 그 부위에 다시 충치가 생겼다. 아마도 다음주부터 후배에게 치료를 받게 될 것 같다.
 오른쪽 위 어금니는 타고난 위치가 좋지 않다. 가지런하지 않고 앞쪽으로 조금 뻐드러져 있어서, 이 사이에 음식물이 잘 낀다. 그래서 학생 때부터 자주 치실로 청소해왔는데 동기의 말로는 옆면이 오목해서 치실로도 청소가 완전히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결국 탈이 난다.

 의사들은 진단 초기에 항상 가족력을 묻는다. 사람의 치아도 타고난 타액의 양, 점성, 치열, 치아의 강도 등이 예후를 상당부분 결정한다. 특별히 튼튼하다면 내비둬도 탈이 안나고, 특별히 취약하면 아무리 열심히 관리해도 탈이 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보통의 위험도를 타고난 경우에 관리가 가장 효과적이지 있지 않을까.
 어쨌든 오랜만에 치과체어에 누워서 마취주사도 맞고, 이런저런 검진도 받으니 묘하더라. 겪어봐야 환자분들 심정을 안다!


2. 신경치료를 한 환자분 한 분이 몇 주째 난리이다. 매번 치과체어에 앉을 때마다 심호흡을 하고, 코를 푸는 등 극도로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경치료 도중 치아벽이 뚫리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치료를 완료한 뒤에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재치료를 권하였는데, 발치 가능성을 고지한게 문제가 되었다. 이를 뽑는 것에 아주 큰 공포를 가지고 계셨던 모양이다. 결국 재치료를 나에게 받기를 거부하셔서, 타 병원에 가시라고 진료의뢰서를 작성해드렸다.
 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여러번 전화로 나에게 소리도 지르고, 하소연도 하셨다. 지난 주에는 별안간 핸드폰으로 전화가 와서 받으니 체중이 5킬로 줄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안된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고싶다, 평생 나를 원망할 것 같다 등의 말씀을 하시더라.
 해당치아의 통증은 심하지 않고, 의뢰서도 잘 써드렸고, 곧 재치료가 시작될 것이며, 충분히 완치될 희망이 있는 상태인데 이런 긍정적인 면은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이런 환자에겐 대체 어떻게 해야하나 막막하다. 치료 중 사고를 낸 것은 분명히 내 책임이다. 하지만 재치료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나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환자의 심리적인 반응은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는 것 같아서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나는 신이 아니다. 앞으로도 수십년 간 환자를 치료할텐데 또 이런 환자가 발생하지 않으리라 어떻게 믿나.
 음. 지금으로선 의뢰드린 병원에서 잘 치료해서 환자분이 꼭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2013년 9월 15일 일요일

대기만성형 예술가




1. 요즈음 정치이야기에 빠져있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울분에 차기도 하고, 가끔은 통쾌하고 속이 시원하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가 재미에 비해서 남는 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일까? 물론 정치의 밑바탕엔 사회와 국가에 대한 해석, 경제원리의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과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행위로 실천되는 과정은 지켜볼 게 못되는 것 같다. 왠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아마 무력감 때문이 아닐까.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이 나라의 많고 많은 국민들도 내 마음과 같지 않다. 내가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선거 때마다 내 한 표를 행사하는 것뿐이다.


2. 얼마 전에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 읽고는, 엉뚱하게 바로 직전에 읽은 Malcolm Gladwell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What The Dog Saw)'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책 안의 챕터 '대기만성형 예술가들(Late Bloomers)'.
 작가에 의하면 피카소의 경우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평균적으로 4배 비쌌다고 한다. 반면 세잔의 경우 6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젊은 시절에 그린 작품들보다 최대 15배 비쌌다. 세잔은 대기만성형 예술가였다.
 우리는 흔히들 천재성과 창조성은 젊은 날부터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에 의하면 이는 대기만성형 예술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작가 벤 파운튼은 변호사로 일하다가 30세가 되어서야 소설가로 전향했다. 그리고 ‘체 게바라와의 짧은 만남’이라는 작품으로 촉망받는 신진작가의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그 작품은 그가 30번 이상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고, 발표도 못한 장편을 4년 간 쓰는 등의 ‘어둠의 시기’를 견뎌낸 이후에 비로소 완성된 것이었다. 그는 48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첫 출세작을 내놓았던 것이다.
 갈렌슨의 ‘늙은 대가와 젊은 천재들’에 의하면 벤 파운튼이나 세잔과 같은 대기만성형 예술가는 아주 실험적으로 창작 작업을 한다. 그들은 목표가 분명하지 않고, 과정이 아주 점진적이다. 그들은 천천히 자신의 길을 찾고, 갈고닦는 완벽주의자이다. 
벤 파운튼은 ‘체 게바라와의 짧은 만남’의 배경이 된 아이티를 30번 이상 방문했다. 세잔은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초상화를 그릴 때 3개월간 80번 넘게 작업을 해야했다.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수십 번 뜯어 고치고, 포기한 끝에 거의 10년 만에 겨우 완성했다.
 갈렌슨에 의하면 젊은 천재들은 막연한 탐험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념적으로 창작 작업을 한다. 명확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조사’나 ‘실험’보다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천재성과 창조성은 늘 젊은 날부터 빛을 발하는게 아니다. 대기만성형 예술가는 자기 분야를 늦게 찾은 것이 아니다. 세잔은 피카소만큼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들의 재능이 늦게 발견된 것도 아니다. 세잔의 초기 작품은 그의 비전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수준이 떨어졌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대기만성형 예술가는 환경의 도움을 받아 '길러진다.' 벤 파운튼은 긴 인고의 세월동안 아내의 든든한 지지를 받았다. 세잔은 에밀 졸라, 피사로, 앙브로와즈 볼라르, 루이 오귀스트 등의 후견인들로부터 막대한 도움을 받았다.

 유시민이 타고난 천재인지, 만들어진 천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경제학 전공자임에도 정치철학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더라.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을 몸소 체험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상들을 공부하고 자기 것으로 녹여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도 참 잘 쓴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경험하고, 글짓기를 해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자극이 되었다.


3. Malcolm Gladwell의 이 책은 그의 다른 히트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떨어진다. '아웃라이어', '블링크', '티핑포인트'를 모두 읽었다면 한 번쯤 구입해 읽어볼만한 수준. 우선 작가가 잡지에 기고한 칼럼들을 골라서 엮은 책이라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성이 부족하다. 칼럼들의 수준도 들쑥날쑥한 면이 있다.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한 챕터도 꽤 있었다.

2013년 9월 6일 금요일

책을 읽더니 잡담


 Paul Krugman의 저서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는 미국에서 작년에 발매된 책이다. Krugman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며 소개하던 게 기억이 난다. 책 내용의 시의성을 고려할 때, 너무 늦게 번역된 감이 있다. 또 나처럼 그의 블로그를 꾸준히 읽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없다. 그럼에도 한 권의 책으로 읽는다는 건 의미가 있다. 큰 흐름 안에서 방향성을 가지고 독서할 수 있고, 내용을 종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경제공부 삼아서 지난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Hubris님, indiz님, 그리고 Paul Krugman의트위터와 블로그를 읽는다. 뉴스 페퍼민트도 도움이 된다. 그 외에는 '김광진의 경제포커스'를 들었었는데, 프로그램이 폐지된 뒤론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를 듣는다.  이만큼도 장기적으로 계속 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버클리 김 사장 같이 Mankiw처럼 Krugman과 다른 시각을 가진 경제학자의 블로그도 함께 읽는 이가 있다. 링크한다. 나에게 권해주기도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읽지 않을 생각.
 결국 시간과 효용의 문제다. 나는 영어를 못해서, 읽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Krugman이 블로그에서 자주 인용하고 추천하는 Mark Thoma의 블로그가 있다. 역시 링크한다.  한 때 함께 읽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무리라고 판단했다.

 경제란 데이터의 수집과 해석의 학문이다. 데이터의 수집은 아무나 할 수 없으나, 해석은 누구나 가능하다. 하지만 알고보면 수집 못지않게 해석도 아주 전문적인 것이라서, 전문가가 아니라면 올바른 시야를 가지기 어렵다. 그래서 Krugman이 나의 고정관념을 깨뜨려줄 때 특히 고맙다.

 나같이 진보적인 경제관을 가진 사람은 흔히들 국가가 개입해서 고부가가치의 제조업을 육성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가지게 된다. 장하준 교수님도 저서나 인터뷰 등에서 자주 이를 언급한다. 그런데 Krugman은 저서 '기대감소의 시대'에서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국가주도의 제조업 육성이 국제무역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기대감소의 시대'는 1997년도에 쓰여진 책이다. 그러므로 장하준 교수님의 이야기가 최근의 학계 입장을 더 정확히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Krugman은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에서 고소득층 증세안에 대한 전통적인 진보측 논리를 비판한다. 우리는 흔히들 '낙수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근거로, 고소득층은 소득에 합당한 수준의 소비를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고소득층은 지나치게 저축하고,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의 소득이 더욱 궁핍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그러므로 양극화는 사회전반의 소비를 위축시켜서 경제의 성장을 억제한다는게 흔히 접하는 진보측 논리이다.
 하지만 Krugman에 의하면, 최근의 연구는 이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양극화는 소비를 촉진한다는 게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한다.
 경제위기 이전에 미국의 고소득층은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증가하는 소득에 걸맞게 소비하고 저축했다. 문제는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이었다. 이들은 양극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저축률이 떨어지고 소비가 증가했다. 맞다. 생각해보면 미국의 경제위기는 지나친 소비로 인해 발생했고, 소비의 위축은 그 결과이다. 양극화는 경제위기를 일으켰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그러한 방식은 아니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부를 추종하는 문화가 만연하여 지나친 소비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온전히 사치를 좇는 군중심리의 탓으로 돌리긴 힘들다. 가령 양극화가 좋은 학교에 자녀를 진학시키기 위한 경쟁을 심화시켜서 교육비 지출을 늘렸고, 위험한 부동산 투자 열풍을 불러와 부동산 거품을 부추겼다는 분석이 있다.

 위와 같은 연구결과가 고소득층 증세안을 부정한다 보기는 힘들다. 1) 경제상황에 따라 계층 간 소비패턴이 다를 수 있다. 과거 활황기에 과소비를 부추긴 양극화가 경기가 위축된 요즘은 소비를 위축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2) 고소득층 증세안은 사회적 정의의 실현이기도 하다. 양극화는 더 교육받은 계층에, 더 사회적 기여가 큰 계층에 부가 분배된 결과가 아니다. 0.1%의 소득은 전통적인 수요 공급의 시장경제 원리가 아니라, 아주 정치적인 방식에 따라서 결정된다.

 진보측 경제학자가 진보측의 전통적인 논리를 비판하면 아무래도 더 믿음이 가게 된다.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가 떠오르는데, 사실 요즘의 내가 그러하다. 가만보면 나처럼 중산층에 속한 사람일수록 돈을 조금 만지게 되면 더 과시적 소비를 하게 된다. 원래 잘 살던 애들은 패션에 관심이 많은 경우가 아니라면 오히려 검소한 듯.
 아무튼 최근에는 신발에 꽂혀서 이것저것 샀다. 사진의 샌들도 무지 비싸게 샀는데, 신고 조금만 걸어도 발이 진짜 아프다. 같은 브랜드의 스니커즈도 가지고 있는데 역시 착화감이 좋지는 않더라. 친한 동기 누나의 명언이 있는데, '비싼 구두는 걸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라더라. 신고 '보여주기' 위한 거라고. 하하.
 그렇다면 저 샌들도 미적 형태를 튼튼히 보존하고자 저리 딱딱하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게 아니고선 저리 비싼게 저리 불편하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