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3일 화요일

착함이냐 운이냐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매치 포인트(match point)는 2005년도 작품이지만 Woody Allen에게 꽂혀있는 요즘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도입부가 인상깊었는데, 테니스의 매치 포인트 장면을 보여주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화자인 주인공은 말한다.

 "누군가 착함(good)보다는 운(lucky)이라 말한다면 인생을 깊이 통찰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이 운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직면하길 두려워한다. 그런 생각에 골몰하면 미쳐버릴 지경이 된다. 시합에서 공이 네트를 건드리는 찰나 공은 넘어갈 수도 그냥 떨어질 수도 있다. 운만 좋으면 공은 넘어가고 당신이 이긴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한다."

 주인공 크리스는 위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테니스를 했지만 실패의 위험이 큰 선수의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테니스 강사가 되어 부유층 자제 톰을 가르치게 되고, 그와 매우 친한 사이가 된다. 톰의 여동생 클로에를 만나고, 동시에 톰의 약혼자 노라를 본 크리스는 강렬한 두 욕망을 마주한다. 클로에를 통해 보이는 신분상승에의 길, 그리고 노라에게 느끼는 강렬한 사랑이 그것이다. 그리고 물론, 크리스는 클로에를 택하고 둘은 결혼에 이른다.

 Woody Allen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에 상처받는 개인을 말한다. 세상의 벽은 너무 높고 단단해, 개인은 소외된다. 크리스는 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지는 사회구조를 깨달았다. 착함(good)이 운(lucky)을 갈음하지 못하는 세상은 답답하고, 불공평한 것이다. 바라는 만큼의 운을 타고나지 못한 크리스가 선수의 길보다 테니스 강사를 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노라보다 클로에를 택하는 것도 그러하다. 강렬한 사랑은 유혹적이지만, 사랑이 무언가를 보장해주던가? 사랑은 강렬한 만큼 위태롭다.

 클로에와 결혼한 이후, 성공가도를 달리던 크리스는 톰과 헤어진 노라를 다시 만나고, 또다시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노라와 불륜을 시작하면서 크리스의 삶을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노라와의 불륜은 달콤했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크리스의 삶은 위험해지고, 노라가 임신을 하면서 그는 결국 선택을 해야만 했다. 물론 그는 착함보다는 운에 자기의 삶을 맡긴다.

 클로에를 선택한 뒤 노라를 향한 욕망을 깨끗히 포기했다면 크리스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거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법, 도덕, 결혼의 책임감과 같은 사회적 울타리가 그의 욕망을 제어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그가 애초에 사회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착함과 악함이라는 도덕률을 지시하는 것도 사회인데, 그것이 날 때부터 나에게 불공정하다면 내가 그에 헌신할 이유가 있겠나. 결국 홀로 고립된 크리스는 그래서 그리도 이기적이고 잔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동기들에게 자주하는 이야기가 있다. 언뜻 의사들은 돈도 잘 벌고, 물질적인 욕망에서 자유로울 것 같지만, 사실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기 쉽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막상 젊은 날엔 부도 권력도 없지만, 가까운 곳에서 부와 권력을 목격하고,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멀리 떨어진 막연한 것보다, 가까이서 목격한 구체적인 대상을 욕망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 부와 권력은 불합리하게 분배되는 듯 보인다.
 때문에 나는 주인공 크리스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어쩌면 주인공 크리스도 테니스 강사를 하면서 숱하게 부와 권력을 지닌 이들을 목격했을 거다. 부조리를 느꼈을 것이고, 저들을 욕망했겠지.
  실제로 나는 크리스처럼 사는 이들을 꽤나 목격했다. 욕망을 일부 포기하면서 결혼을 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고, 배가 부른 뒤 예술을 찾듯, 나중에야 불륜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욕심이 많다. 크리스의 이기심은 도를 넘었다. 그의 소외된 자아는 자기의 작은 욕망에 머물러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지 못했다. 오죽하면 사랑하는 노라와 자기의 아이, 죄없는 목격자마저도 자기 안위를 위해 무참히 살해할 수 있겠는가. 내가 착함보다 운을 앞세우면 이를 비난할 수 있겠나? 선하게 사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를 보고, 깊이 공감하면서, 나의 사회관계가 나에게 가지는 의미를 떠올린다. 너무나 크다.

2013년 4월 17일 수요일

현실과 낭만 사이

(스포일러 있습니다)

 Woody Allen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의 영화는 주제가 뚜렷하고, 군더더기없이 이를 다룬다. 재기발랄함과 따뜻한 시선이 있다. 거대한 서사시보다는 유쾌한 단편집을 한토막 읽는 기분과 비슷한 것 같다. 내 취향이다.

1.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Vicky Cristina Barcelona)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현실과 낭만을 대비하며 다룬다.
 현실적인 성격의 비키와 낭만적인 성격의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 여행을 가서 매력적인 화가 후안 안토니오를 만난다. 비키는 안토니오의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고, 여행을 마친 뒤에도 온전히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크리스티나는 안토니오, 그의 전처 마리아와 동거를 하는 과정에서 사진작가로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낭만의 시간은 짧고, 크리스티나는 현실로 돌아올 때임을 깨닫는다. 비키 역시 안토니오를 잊지 못하고 그를 찾아가지만, 안토니오와 마리아의 다툼을 목격하곤 두려움에 압도되어 달아나버린다.

 감정은 요동친다. 격해졌다가 이내 가라앉기도 한다. 하나의 감정이 다른 감정으로 번지기도 한다. 사랑을 감정이라 한다면, 사랑은 지속되기 힘든 촛불과 같은 것이다. 가끔은 활활 타올라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때도 있지만, 그럴수록 결국엔 한줌 재로만 남아 사그라질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성격의 비키는 말할 것도 없고, 낭만적인 성격의 크리스티나마저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들이 돌아온 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각박한 스케쥴, 고층 빌딩, 빼곡한 일거리가 쌓여있는 미국의 도시일 것이고, 돈을 잘벌지만, 성적매력이 없는 비키의 남편일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을 보자. 미국의 도시는 그들이 바르셀로나로 휴가를 떠날 수 있는 수입과 삶의 터전을 제공했다. 비키의 남편은 능력있고 다정하다. 그와 함께면 감정의 들썩임은 덜할지라도, 따뜻한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2.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약혼녀 가족과 파리로 여행을 온 소설가 길은 현실과 낭만 사이에서 내적인 갈등을 한다.

 길은 미국에서 꽤 팔리는 시나리오 작가다. 예쁘고 부유한 약혼녀도 두고 있다. 하지만 길과 약혼녀의 관계는 다소 피상적이고, 그는 상업작품을 접고 순수문학을 하고 싶다. 그는 1920년대 파리를 황금시대로 여기는 몽상가이다.
 어느날 그는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다가 환상적인 여행을 통해 1920년대 파리에 도착하고, 헤밍웨이, 피카소, 스캇, 달리 등과 교류한다. 그리고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인 아드리아나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또다시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서 아드리아나가 생각하는 황금시대인 1890년대로 도착한다. 아드리아나는 그곳에서 로트레크, 고갱 등을 만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길은 낭만적인 과거는 불만족스런 현실로 인한 도피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실로 돌아온 길은 약혼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파리에 머무르며 새로운 삶과 사랑을 찾는다.


3. 지난 주에 얼마전 결혼한 친구와 부산 해운대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아침에 리조트 창 밖에 보이는 바다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씨앗호떡, 스시, 아구찜, 슈크림 빵도 맛있었다. 늘 그렇듯 친구와 이성문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미난 일화가 생각난다. 친구는 해운대의 집값이 서울보다 싸니까, 집을 마련해서 미녀를 꼬시기 서울보다 쉽다고 주장했다. 나는 해운대가 서울보다 집을 마련하기 3배 쉽더라도, 부산 미녀의 수가 서울의 1/3에 불과하므로 기대값은 3*1/3=1 동일하다고 응수했다. 친구는 정말 나다운 사고방식이라고 말하더라.

 사랑은 일종의 개시제(initiator)이며, 촉매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무나 클레오파트라가, 양귀비가 될 수는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 현실적인 계산만으로 맺어진 관계는 시작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하지만 낭만적인 감정을 현실보다 앞세워서도 안된다. 감정의 거품이 걷어지면 참담한 현실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현실과 낭만 사이 어디쯤에서 균형점을 잡아야만 할까. 영어를 잘하는 여자에 대한 환상을 내가 어느 지점에서 포기해야 할까? 예술을 하는 여자에 대한 환상은? 키가 큰 여자에 대한 선호를 굳이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패션 센스에 대한 선호는 또 어떠한가?
 어디서도 답을 구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 우유부단한 몽상가 길도 황금시대로부터 현실로 돌아와, 약혼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선택을 해냈다. 길은 어떻게 그런 과감한 선택을 했을까? 또다시 답이 없는 고민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