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7일 수요일

불친절한 블로그


1. 가평읍 보건소에서는 의욕을 가지고 진료한지 얼마되지 않아 제법 많은 환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하면 보건지소는 그렇지 못해서 아직은 진료 출장을 와도 하루종일 한산할 때가 많다.

 블로그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폭이 조금 더 넓어졌으면 좋겠고 치과 지식이나 진료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그 스펙트럼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내가 행위자이고 독자는 대상자인 입장이라 아무래도 치과 이야기를 하는게 뭔가 어려운 거 같다. 어쨌든 치과 지식의 전달 내지는 치과 병원의 홍보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소재로서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 그리고 내 블로그의 글을 가끔 혼자 읽어보는데 참 딱딱하고 지루하더라. 허나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불친절하고 지루한 글을 쓸 생각이다. 즉흥적인 이야기는 K공대의 BBS, 대인관계는 페이스북, 그리고 이게 내가 블로그를 하는 방식이다.


2. 경제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더 큰 고통을 겪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최근 기존 구조에 대한 극단적인 반발이 나타나는 것도 이런 이유일거다. 그리고 솔직히 이들의 파업은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칼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10년째 동결된 택시요금, 월120만원의 수입, 3000시간이 넘는 노동시간은 누가 보아도 열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당국은 그간 고압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물론 공공요금 인상을 꺼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포퓰리즘이다.

 슬프게도 택시기사들은 제 아무리 단결하고 파업이라는 최종수단을 사용해도 그 사회적 영향력이 약하다. 손에 쥔 돈도 적고, 지적 기반은 약하며, 평판마저 안 좋다. 도로의 택시기사들은 정말 '못됐다'. 그렇지만 이들이 도로를 거칠게 달리고, 손님을 갈아 태우게끔 몰아붙인 것이 바로 이 '사회'라는 점을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3. 정책을 통해 시장을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괴짜 경제학에 나오는 매춘부에 대한 유명한 예를 살펴보자.
 정부가 남성의 성적 욕구라는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채 매춘시장을 규제하자 매춘시장은 더욱 음지로 숨었고 더욱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만 접할 수 있는 고급의 쾌락으로 탈바꿈했다. 매춘부의 가격이 하락한 것은 양성 평등의 발전과 성 개방의 풍토로 인해 돈을 받지 않고 혼전 성관계를 맺는 여성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적 욕구가 다른 건전한 해소 출구를 발견하자, 매춘시장은 약해졌다.
 이 사례를 공급주의 경제학의 실패에 대한 적절한 예로 취급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공급 측면의 시장 규제가 무용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급 규제가 상품에 대한 접근성을 악화시키면 상품에 대한 수요도 함께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는 그런 점에서 여전히 정당성을 얻는다) 그리고 해당 상품에 대한 적절한 대체재가 존재할 때 수요는 더욱 쉽게 조절될 수 있다. (위 사례의 경우엔, 매춘부를 대체하는 자유연애의 대상자)

 한편 근로시간의 단축을 위한 '근로시간 단축 청구제'가 새로이 도입될 거라고 한다. 법조계에 종사하는 고교동창 한 명이 페이스북에서 위 정책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더라.
1) 경제 침체기에 저소득 고연령 노동자들이 근로시간을 단축할 인센티브가 없다.
2) 노동자의 선택에 고용주가 개입하여 정책 방향을 흐릴 것이다.
이 중 2)는 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통해 다스릴 문제이니 제쳐두고 1)만 생각해보기로 하자.

 1)은 수요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고용주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노동자가 아닌 고용주로 하여금 노동자의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근로기간을 연장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이는 더욱 실현가능성이 적다.
 고용주는 매년의 기업 수익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노동자의 인생설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퇴직한 이후에 새 삶을 잘 설계할 수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근로시간이 단축되면, 당장 감소한 업무만큼을 새로 채용한 미숙련 노동자를 통해 메꿔가야 한다. 물론 노동시장의 효율성이 향상되어 고용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면 고용주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장기적인 혜택이어서 이를 위해 기업의 단기이익을 희생할 고용주는 아마도 성자(星者)에 가까울 것이다.
 반면 노동자는 시작단계에서의 적절한 유인책과 잘 짜여진 재취업 교육이 동반되면, 정책이 유도하는 방향대로 근로시간을 단축하려 할 인센티브를 가진다. 노동자들은 늘어난 근로기간을 바탕으로 노후를 설계하여 불안정한 자영업 시장보다 나은 다양한 출구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고용문제가 해소되려면 근로기간은 연장되어야 하고, 근로시간은 단축되어야 하며, 고용률은 증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필수적이고 취업 및 재취업 교육으로 정책 방향이 나아가야 옳다. 안정된 고용은 교육문제와 양극화 문제와 같은 많은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복지정책들은 계속해서 공론화되고 보강되어야 한다.

2012년 6월 20일 수요일

된장녀와 알파걸


1. 한국의 가계부채와 스페인을 비교하는 기사가 요즘 자주 눈에 띈다. 전에도 한 차례 언급했듯이, 스페인의 위기는 유럽 문제의 원인이 복지과잉이 아님을 증명한다. 스페인 위기의 원인은 정부의 재정상황이 아닌 가계의 재정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스페인의 특징은 지금의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다.
 실제로 2011년 3분기 한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는 154.9%로 스페인보다도 10-20%가량 높으며, OECD 평균의 4배에 해당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특수한 전세제도로 인하여 발생하는 비금융부채를 포함하면 사실상 위의 수치는 230%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세계최고수준이다. 우리나라의 가계부채와 관련하여 이미 연초에 GS에서 보고서를 내놓은 바가 있었고, 이에 대한 프레시안의 반박기사도 있어서 과거 이 둘을 포스팅한 적이 있다.
 스페인보다 심각한 한국의 가계부채 상황이 당장 우리나라에 심각한 경제위기가 올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 포스팅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전세계적인 저금리 기조가 우리의 위기를 미봉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계속해서 가계부채라는 이름의 폭탄을 키워간다면, 어느 순간 세계 정세의 격변기가 닥쳐올 것이고 우리나라는 폭탄이 폭발할 시점과 그 강도를 조절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이리도 심각해졌는가? 세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부동산 거품 2) 낮은 생산성의 자영업 3) 심화된 소득양극화
 이 원인들은 서로 복잡하게 상호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구조적 문제점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2. A와 B란 두 여성이 있다고 하자. 이중 A는 예쁜 된장녀이고, B는 현명한 알파걸이다. A는 잘나가는 중소기업 사장 C와 결혼을 했고, B는 평범한 직장인 D와 결혼을 했다. 중소기업 사장 C는 1년에 5억을 벌어들이고, 직장인 D는 1년에 5천만원을 벌어들인다.
 A의 가사일은 형편없고, 소비습관도 건전치 못했다. A는 C의 생산성에 10%밖에 기여하지 못했다. 반면 B는 가사일은 물론, D를 훌륭히 내조했다. B는 D의 생산성에 무려 80%의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A와 B 중 누가 더 훌륭한 아내일까?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은 물론 B를 더 훌륭한 아내라 말한다. 하지만 위 질문을 경제학적으로 바꿔보자. A와 B 중 누구의 생산성이 더욱 높을까? A는 C의 생산성에 10%의 기여를 했다. 즉, 5천만원/1년의 생산성을 가진다. 반면 B는 D의 생산성에 80%나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4천만원/1년에 해당한다. 즉, 경제학적으로 A는 B보다 더 우수한 생산성을 가진다. 현실이 이상을 배신하는 사례 중 하나인 것이다.

 세상은 고립되어 있지않고, 제조업의 생산성은 무궁무진하게 향상되는 반면, 서비스업의 생산성은 그 발전이 더디다. 그렇기에 국가는 무엇보다 뛰어난 생산성의 제조업(C)을 갖추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서비스업(A)도 높은 연봉을 받을 수가 있다. 우리보다 더 짧은 시간 설렁설렁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더 높은 임금을 받는 선진국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모두 예쁜 된장녀 A와 같은 셈이다.
 그럼에도 서비스업이 시대가 바뀔수록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고용효과 때문이다. 제조업의 보다 많은 부분은 자동화되고 있지만, 아이들의 교육은, 환자의 진찰은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도 인간이 맡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의 고용구조는 경직되어 있고, 이것이 수많은 사회문제의 원인이 되어왔다. 왜 의사가 최고의 인기직종이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캠브릿지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는 고용의 불안정성이 지나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IMF 이후에 주주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단기적 유동자금의 압박때문에 기업들이 단기 소득을 높이고자 고용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노동시장의 비유연성을 함께 이야기해야만 할 것같다. 회사를 그만두면 재취업의 길이 없기 때문에 모두들 울며 겨자먹기로 자영업을 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결국 유래없이 엄청난 자영업자의 수, 이들의 낮은 생산성, 가계부채의 악화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는 분명 재벌개혁 이상의 것이다. 이는 재취업 교육,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같은 복지정책 뿐만 아니라, 기업이 장기이익을 추구하기에 알맞게끔 금융자본을 효과적으로 개혁하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높은 고용률을 이룩하지 않고서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선 공약으로 이미 충분히 높은 근로소득세를 건드리려 하지말고, 금융세, 상속세 등의 다른 조세정책을 가다듬는 것이 우선하였으면 좋겠구나.
 그러고보면, 요즘 부동산정책도 금융정책과 따로간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정부의 각 부처 간 입장 차이가 낳은 비효율성의 예가 아닐까.

2012년 6월 10일 일요일

프로메테우스 이야기


(스포일러 포함)
 나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ot)의 이름에 앞서서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는 작품을 먼저 알았다. 중학생 시절, 일본 SF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아주 인상깊게 보았다. 인조인간을 통해서 인간성을 바라본다는 주제가 신선했고, 무엇보다 동서양이 뒤섞인 듯한 기묘한 미래상이 매력적이었다. 곧 '공각기동대'가 '블레이드 러너'에 주제와 세계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청소년 시절 줄곧 '블레이드 러너'를 마음 속에 두었다.
  
 '블레이드 러너'를 직접 본 것은 아마도 대학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껏 통틀어 4,5번 가량 보았을거다. 영화를 통해 받은 인상은 그 이상으로 컸다. 어쨌든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리들리 스콧의 이름을 알았고, 뒤늦게 '에일리언'이 그의 작품인 것도 알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에일리언'의 프리퀄(prequel)이지만, 여러모로 '에일리언'보다는 오히려 '블레이드 러너'를 닮은 작품이었다.

 영화 속에서 피터 웨이랜드가 엔지니어에게 생의 연장을 요구하는 장면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로이가 타이렐 박사에게 수명을 연장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인조인간인 데이빗은 "모든 자식들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라며 일관되게 인간을 말살하려 하는데, 아주 함축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 역시 '블레이드 러너'의 리플리컨트들이 타이렐 박사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 맞닿아있다.

 영화 속에서 인조인간인지 의심받는 여인 비커스는 어딘가 '블레이드 러너'의 레이첼과 닮았다. 비커스의 방과 어린 시절의 홀로그램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온갖 액자와 사진에 의지해 어린 시절의 기억에 열중하던 레이첼의 그 '방'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비커스도 블레이드 러너의 레이첼이 그랬듯이 인간이 아닌 인조인간일지도 모른다. (비커스 메레디스와 피터 웨이랜드는 성도 전혀 다르다.)

 그러고보면 영화에서 창조주 엔지니어를 멸망시킨 건 다름아닌 에일리언이기도 하다. 사실 에일리언은 모체를 죽이고 탄생하는 무척 상징적인 괴물이다.


 감독은 창조자에 대해 피조물이 가지는 복잡한 감정을 묘사하는데, 이는 한 가지로 똑부러지게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이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비유하던데 정말로 닮은 점이 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창조자란 동경의 대상이고, 넘어야 할 산인 동시에, 태생적 결핍의 책임을 묻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나 로봇이나, 심지어는 에일리언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자의 태도는 일방적이기 이를 데 없다. 엔지니어에게 있어서 인간도, 에일리언도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다름아니다.

 영화의 주인공 격인 엘리자베스는 데이빗의 부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놓지 않고 있다. 그녀가 창조주를 찾아 다시금 떠난다는 결말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데커드가 레이첼을 데리고 도망치는 마지막 장면이 그러했듯 나름 낭만적인 장면이었다.

 '프로메테우스' 역시 '블레이드 러너'가 그러했듯 생의 의미, 불멸과 잉태, 창조와 파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무지하게 불친절한 영화였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만도 하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사전에 '블레이드 러너'를 보거나, 리들리 스콧의 SF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이해가 용이할 것 같다. 나같은 리들리 스콧의 SF 매니아라면 좋아할 수 있는 영화.

p.s : 영화 초반에 인간을 창조한게 엔지니어라면, 그 엔지니어는 누가 창조했을까 라는 고전적인 질문이 나오던데, 이에 대해 논파한 예전 포스팅을 링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