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일 금요일

그 시절과 지금

 러셀의 저작은 이제 그만 읽을 생각이긴 했으나,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해서 오랫만에 '결혼과 성'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자제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며, 또 우리의 제도와 도덕적 관습이 자제의 필요성을 최대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최소화하기를 바란다. 자제의 효용은 기차가 달린 제동장치의 효용과 흡사하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유용하지만, 방향이 옳을 때에는 유해할 뿐이다."

 러셀은 과거 원시시대부터 농업사회, 중세를 거쳐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결혼제도와 성 의식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고찰한다. 특히 기독교가 결혼관과 성의식에 미친 역할을 비판하고, 보수적 성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촉구한다. 구체적으로 혼전 성교는 물론이고, 혼전 동거, 더 나아가서 우애 결혼(compassionate marriage)까지 허용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러셀의 책을 읽을 때는 시대적 특성과 러셀의 성장배경을 고려해야만 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말기에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도덕적 인습(특히 기독교의 그것)이 유년기에 미치는 폐해를 경계했다. 그는 그 시대 지성인의 대부분이 그러했듯 과학의 힘에 다소 경도되어 있었고, 심리학과 유전학의 발전을 지나치게 확신했다. 파시즘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네셔널리즘의 힘을 과대평가한 반면, 자본주의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충분히 예상하지는 못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국가가 어버이의 자녀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과 일부일처제 가정의 형성을 러셀이 예상한만큼 약화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는 분명히 경제활동의 최소단위로서 개인이 강화되고, 국가의 역할은 '작은 정부'라는 모토아래 개인의 보조에 그쳤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과 여의 역할문제는 여전히 과도기적 상태로 생각된다. 페미니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견해가 관습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주의는 구시대적 유물이 되고 있지만 이는 냉전의 종식과 세계화라는 경제적 효과에 의한 것일 뿐, (러셀이 바랐던)국제정부의 탄생 때문은 아니다. 남녀관계는 지난 1세기 동안 많이 개방되었다. 산아제한 허용, 피임법의 보급, 이혼의 확대도 전세계적으로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룩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일처제 가정이 지속되는 한, 간통문제는 (비록 약화되었을지라도)여전히 결혼생활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사랑과 질투를 둘다 본능으로 규정하고, 사랑을 확대하고 질투를 축소하라는 러셀의 견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큰 설득력을 가지는 것 같다.

 솔직히 처음 읽은 책도 아니고, 나로선 지성의 훈련이라는 측면을 제외하면 이 책은 더이상 유익하지 못하다. 금새 읽기는 했다만..
 자, 이제 촘스키의 책을 읽을 차례다. 근데 이거 제목이 '촘스키, 러셀을 말하다.'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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