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6일 수요일

이데아와 지성의 힘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을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을 때, 그림과 음악이란 형식을 뛰어넘어, 그 안에 내포된 아름다움이라는 공통의 무언가를 포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켜서 이데아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실재(reality)와 현상(appearance)을 구별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현상을 감각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감각기관에 포착되는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사물은 모순되는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지 못하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 그 자체(beauty itself)가 될 수 없다. 반면에, 그 개개의 사물을 통해 포착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으면, 우리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idea)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개개의 그림과 음악은 이 이데아의 일부에 참여함으로서 아름다운 느낌을 줄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현상을 넘어 실재를 포착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철학을 함으로서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바라보는 세상에서 만물은 동등하지 않고, 더 위대한 것, 더 실재에 가까운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더 높은 수준의 지성에 도달해야만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사상과 기독교의 간극이 발생한다. 기독교는 누구나 신심(信心)을 가지면 덕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하지만, 플라톤에게는 지성이 덕을 갖추는 필요조건이 된다. 관련된 과거 포스팅을 링크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철학자는 감각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만인을 구원하는 특별한 인물이며, 여기서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나오게 된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동굴 속에 갇힌 죄수와 같다. 그는 빛을 등지고 있고 동굴 밖을 바라볼 수 없다. 죄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자신과 사물의 그림자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림자를 실재(reality)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철학자는 동굴에서 탈출한 자이며, 그는 자기가 지금껏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철학자는 동굴로 돌아가 죄수가 동굴을 탈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려 한다. 하지만 죄수를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빛 속에 있다가 다시 어두운 동굴에 들어갔기에 죄수보다 동굴 안을 잘 바라보지 못할 것이고, 죄수는 그러한 철학자를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이데아의 사상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1) 우선 현상(appearance)의 그림은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지 않는다 라는 문장을 분석해보면, 사실은 그림의 어떤 부분은 아름답고, 그와는 '다른' 어떤 부분은 아름답지 않다고 구분할 수 있으므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림과 음악을 통해 접하는 아름다움에 어떤 유사한 느낌이 있는 것은, 인간이 감각을 받아들이고 뇌가 반응하는 과정을 고려해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이데아의 존재를 근거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2) 이데아는 보편개념에 대한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문장에서 소크라테스는 고유명사로서 특수개념이라 할 수 있고, 인간은 보편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개념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확장해준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보편개념이 존재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데아가 필요하다는 것은 보편개념을 또다른 특수개념으로 혼동한 것이다.
3) 이데아를 비판한 유명한 '제3인간 논증'이 있다. 어떤 인간이 인간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간과 인간의 이데아 둘 다를 포함하는 제3의 이데아가 존재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반복될 수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이데아의 연속이 발생한다.

2.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만인이 동등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노예 제도가 보편적이었던 그리스 시대에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귀족층만이 지혜를 쌓아갈 수 있었고, 보다 높은 지성을 갖춘 철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데아의 존재를 부정하더라도, 덕을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이러한 견해마저 부정하기는 힘들어보인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누구나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선택된 소수에 의한 통치라는 결론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버트런드 러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를 비판한다.
1) 실제 세상은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엇갈려있고, 갈등은 무지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타협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더 뛰어난 소수를 구별해낼 방법이 존재하는가? 혈통만으로 귀족이나 왕이 통치를 하는 것은 말이 안되고, 어떤 방면의 전문가조차 때로는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러셀에게 있어서 결국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 통치를 맡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최종근거가 된다.

 하지만 1)의 이해관계의 타협이라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지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올해 대선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기업과 노조, 성장과 복지도 계급갈등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지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지성이 신자유주의를 선택했던 과거에는 기업과 성장의 가치가 승리했고,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환상을 새로운 지성이 무너뜨리고, 노조와 복지의 가치가 다시금 힘을 얻고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지성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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