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9일 목요일

고양이와 쥐

 절제와 인내에 대하여 흥미로운 관점의 글이 있었다. 절제는 좋아하는 것을 참는 것, 인내는 싫어하는 것을 참는 것이라는 정의가 그것인데, 아주 색다른 분석이라 매력적이었지만, 어딘가 계속 곱씹어보게 되더라.

 이제와 생각해보니 절제와 인내에 대하여 새롭게 정의를 할 필요가 있겠다. 절제와 인내는 둘다 '참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절제는 스스로 행하는 것이고, 인내는 타의로 행하는 것이다. 절제에 강하고 인내가 부족한 이는 보다 개인적인 직업에서 만족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인내에 강하고 절제가 부족한 이는 보다 조직적인 직업에서 만족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절제에 능한 이들이지만, 이를 지키는 것은 인내에 능한 이들의 몫일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치과 병원은 절제를 기르기보다 인내만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배움의 효과는 그것이 '하고 싶은 것'일 때 배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인재들을 모아놓고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교육론'에는 새끼 고양이에게 쥐를 잡는 법을 교육시키던 아놀드 박사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쥐를 잡으라 하고, 효과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할 때마다 새끼 고양이를 매질한 결과, 고양이는 성년이 된 이후에도 쥐만 보면 무서워하며 숨기에 바빴다. 잘못된 인센티브를 구조화시켜놓고 목소리 높여 '쥐를 잡는 고양이의 숭고함'을 외쳐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고보면, 병원만큼 잘못된 인센티브 구조 하에 교육을 시키는 조직도 드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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