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8일 월요일

비이성적 확신



 공보의 생활을 하면서 평일 중에는 병원선 동료들과 자주 어울린다. 의사 형이 둘 있고, 한의사 친구가 한명 있는데, 다들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 내 행운에 감사한다. 통영의 영화관은 두 군데가 있는데 둘다 평일 중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오죽하면 최신 개봉작을 보러가도 우리 4명만이 관객으로 입장할 때도 많다. 덕분에 발을 뻗거나 누워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전용관으로 잘 이용하고 있다.

 지난 주에는 '특수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액션 위주의 형사물인데, 정경관계의 유착과 비리에 맞서는 내용이었다. 재미 자체는 그저 그랬다.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빚더미에 앉은 서민들의 시위, 그들을 공권력으로 억누르는 사회지도층의 모습이 아주 전형적으로 다뤄지는데, 문득 사람들이 이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영화가 잘 투영하고 있구나 싶더라. 이 영화는 (그 흥행 여부와는 별도로) 분명 우리의 '분노'를 잘 대변하고 있었다.
 요즘 자주 버트런드 러셀 作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에서의  '합리적 회의'와 '비이성적 확신'의 대비가 떠오른다. '분노'는 냉정한 판단에 필수적인 절제와는 거리가 멀다. 19세기에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자본가에 대한 분노는 파시즘이라는 이름의 기형아를 잉태했고, 사회주의라는 이상도 분노를 기반으로 했기에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항거로서 표현될 수 밖에 없었다. 러셀이 추천하는 '합리적 회의'란 아주 상식적인 것이다. 모든 주장을 근거를 바탕으로 판단하되, 확신을 경계하고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이데올로기로 승화되고, 이는 너무나 쉽게 우리를 '비이성적 확신'의 늪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경제학 기조이다. 하지만 이는 자유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정치사회적으로 시장만능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금융위기를 거쳐 유럽위기를 겪으며, 또 이명박 정권을 겪으며, 요즈음 신자유주의를 옹호할라치면 큰일이라도 당할 것 같다. 미국에서도 보수적 경제학자인 맨큐의 수업을 하버드 학생들이 거부해서 화제더라.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1108017009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거품을 제거하고 이를 경제학 자체로 바라보면, 우리가 손쉽게 '이건 틀렸어!'라 말하기 어려운 강력한 논리를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펠드스타인과 서머스가 이야기하는 경제가 그들이 대표하는 보수, 진보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만큼 크게 다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펠드스타인보다 서머스를, 맨큐보다 크루그먼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합리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성급한 판단을 보류하고 신자유주의 또한 이해하려 노력해야 옳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을 비판하고 대안적 경제 모델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비주류는 주류가 아니기에, 주류를 성급히 비난하고 강한 자기확신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음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FTA 관련 논쟁들을 접하며, 많은 이들이 '비이성적 확신'에 빠져듦을 목격했다.  정부가 주장하는 FTA의 경제 효과 못지않게, FTA에 대한 반대 역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주장되고 있다. 멕시코의 경제위기를 미국의 음모로 규정하지만, 이는 미국이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멕시코에 수백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한 사실은 조금도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현 정권과 여당이 심판을 받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걸맞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나는 야권 통합을 지지하고 이에 한표를 행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야당이 계속해서 FTA폐지를 당론으로 들고 나올 경우 강하게 시험받을거다. 난 FTA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미 체결된 FTA를 다시 폐지하는 것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훼손한다고 생각한다. 한미 동맹에도 좋지 않다.
 우리나라의 좌파가 국민의 '분노'를 조장하기 보다는, 이를 현명하게 다스려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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