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한 해의 마무리
2012년이 저문다. 한 해 동안 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퍽 많다. 경상남도 병원선 근무를 마치고 경기도 가평군 보건소로 왔다. 치과 진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주식 시장에서 손실을 보았다. 연애를 새로 시작하지 못했다. 운전을 시작했다. 운동능력을 유지했다. 군살은 조금 쪘다. 옷 쇼핑에 눈을 떴다.
돌이켜보니 다른 무엇보다 책을 읽고, 마음맞는 친구들과 토론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기억에 남는다. 아, 블로그도 나름 열심히 했네. 어느덧 꽤 많은 포스팅들이 쌓였다.
여름을 보낼 즈음에 그간의 독서를 중간정리하고, 앞으로의 독서를 계획했었다. 예상은 했지만 계획과는 많이 다르게 독서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난 좋다. 난 계획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는 편이다. 매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을 하는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있다. 학생 시절엔 이 핑계로 수업을 째거나, 안 듣고 딴 짓을 하는 나를 합리화하곤 했다. 그래도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때로는 단기적인 목표도 철저히 완수해야만 한다. 언제나 맞아떨어지는 삶의 법칙 따위는 없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나 자신을 돌아봐야만 한다.
1. 올 한 해 읽은 책 리스트. 작년에 읽고 다시 읽은 책들은 제외하고 옮긴다.
사랑의 추구와 발견/파트리크 쥐스킨트 저/강명순 역/열린책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파트리크 쥐스킨트 저/강명순 역/열린책들
나쁜 사마리아 인들/장하준 저/이순희 역/부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저/부키
티몬이 간다/유민주 저/이콘
러셀의 철학노트/페인버그, 카스릴스 저/최혁 역/범우사
철학의 문제들/버트런드 러셀 저/박영태 역/이학사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로버트 E.에그너 저/이순희 역/비아북
사랑의 기술/에리히 프롬 저 /황문수 역/문예출판사
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저/차경아 역/까치
사랑예찬/알랭 바디우 저 /조재룡 역/길
티핑 포인트/말콤 글래드웰 저/임옥희 역/21세기 북스
아웃라이어/말콤 글래드웰 저/노정태 역/김영사
블링크/말콤 글래드웰 저/이무열 역/21세기북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토드 부크홀츠 저/이승환 역/김영사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김동조 저/북돋움
속지않는 국민이 거짓없는 대통령을 만든다/김상범, 박설리, 박소령, 유혜영, 최현도 저/위즈덤하우스
설득의 심리학/로브터 치알디니 저/이현우 역/21세기북스
설득의 심리학2/로브터 치알디니, 노아 골드스타인, 스티브 마틴 저/윤미나 역/21세기북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스튜어트 다이아몬드 저/김태훈 역/8.0
좋았던 책을 대충이라도 꼽아볼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 중에는 '로시니'가 더 좋았다. 장하준의 저서는 '나쁜 사마리아 인들'. 러셀의 책은 나와 같은 광팬이 아니라면 '철학의 문제들'이 가장 유익하다. 인식론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 좋았다. 말콤 글래드웰은 대단하다! '아웃라이어', '블링크' 모두 추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설득의 심리학' 시리즈는 모두 요즘 나의 관심사인데, 더 자주 읽어서 체화(體化)시키고 싶다.
2. 내년에 이뤄야만 하는 것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1) 개원준비 2) 연애사업이 가장 중요한 목표. 1)을 이루기 위해서 치과공부에 더 많은 비중을 두려고 한다. 교양독서는 조금 줄일 생각이다. 연애는 유동성을 늘려야하는데, 올해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새로 구입한 책 위주로 독서 계획을 새로이 적어두자.
BBK의 배신/김경준 저/(주)비비케이북스
이번엔 다르다/케네스 로고프, 카르멘 라인하트 저/최재형, 박영란 역/다른세상
기대감소의 시대/폴 크루그만 저/윤태경 역/황금사자
새로운 미래를 말하다/폴 크루그만 저/예상한 역/엘도라도
넛지/리츠더 탈러, 캐스 선스타인 저/안진환 역./리더스북
생각에 관한 생각/대니얼 카너먼/이진원 역/김영사
행동경제학/도모노 노리오 저/이명희 역/지형
파시즘의 대중심리/빌헬름 라이히 저/황선길 역/그린비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저/홍영남, 이상임 역/을유문화사
모든 것의 가격/에두아르도 포터 저/손민중, 김홍래 역/김영사
철학은 지금껏 공부한 내용의 복습만으로도 벅차고, 충분하다. 경제는 더 폭넓게 독서하고 싶고, 올해 말부터 이제 심리와 행동에 관한 분야로 관심사를 넓히려 한다. 지루함을 참고 나머지 시간은 치과공부에 쏟아보자.
p.s : 다니엘 크레이그는 내 마음대로 올해의 남자. 이 사람 좋다는 지인들이 꽤 많다..
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사적이고 공적인 공간
1. 좀 더 객관적으로 대선결과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번 대선을 참여정부에 대한 심판의 연장으로 여긴다. 변화에는 스트레스가 따르고, 참여정부에 크게 실망한 50,60대는 또다시 믿음을 주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정희의 TV토론이 보수결집을 이끌었다거나, 여성대통령의 힘, 박정희 정권의 힘이라는 분석도 일리가 있지만 근본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주당은 많은 면에서 역부족임을 드러냈다. 어쨌든 변수를 통제할 수 없고, 시간을 고정할 수도 없어서 대선의 분석은 쉽지않다. 많은 공부가 되는 것 같다.
'패배의 분석과 기적의 희망'은 균형잡히지 못했고, 지나치게 침울하다. '정치블로그가 아닌데'가 더 나은 분석이다. 그런데 후자보다 전자의 조회수가 10배는 많다. 조금 창피하네.
돌이켜보면 블로그에 글을 올린 이후 생각이 바뀐 게 꽤 있다. 기억이 나는 걸 언급하자면, 한미FTA는 요즘 더 나쁘게 생각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로스쿨에 대해서도 좀 더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편견을 쏟아낼만큼 사적이지만, 다시 곰곰히 스스로를 돌아볼 만큼 공적인 공간이라 지금이 딱 좋다는 만족감이 든다.
2. 오랫만에 경제이야기를 해보자. 경제포커스를 통해 얻은 정보다. 공화당이 부자증세에 반대하지만, CNBC 연소득 45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을 설문조사한 결과 67%가 증세에 찬성했다고 한다. 올해 여름 62%보다 오히려 증가한 수치. 미국의 부자들이 우리나라 부자들보다 경제와 사회에 대한 인식수준이 높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이 자본소득이 많아서 세금인상보다 통화공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더 우려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미국 시민 10명 중 8명의 소득은 오히려 줄었다는 최근 분석 결과가 FRB의 양적완화에 대한 반대논거로 제시되고 있는 모양이다. 소득 상위1%가 5.5% 소득이 증가했는데, 하위 80% 소득은 1.7% 오히려 줄었다. 기준금리가 낮아서 중산층 예금자들의 소득은 줄었으나 고소득층은 여전히 주식배당 등으로 금융소득이 높다는 분석인데, 이를 바탕으로 양적완화가 실질적 효과가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진행자 김광진 씨의 마무리 발언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자본에 대한 비율로 이자, 배당이 매겨지기 때문에 예금도, 배당도 고소득층에게 매우 유리하다. 인플레이션의 위험성이 자주 언급되지만, 미국의 기대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낮다. 물론 양적완화만으로 투자를 유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부족함을 의미하지, 그릇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위와 같은 조사결과가 나왔으면 오히려 더 공격적인 금융소득과세를 시도해야 옳지않을까? 또한 양적완화가 양극화를 되려 심화한다고 보기엔 추적기간이 너무 짧다. 고소득층의 소득이 증가한다는 것은 바꿔말하면 투자심리가 개선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3. 2013년은 본격적인 통화전쟁이 벌어지는 한 해이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통화를 찍어내고 있다. 이제와 더 공격적인 금리인하로 대응하는 것은 어렵고 효과도 적을거다. 미국의 회복세가 변수지만, 일본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수출이 상대적으로 부진할 수 있다. 원자재 가격상승과 가계부채로 내수 역시 더 얼어붙기 쉽다. 결국 내년에도 올해와 같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의 괴리가 예상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나 문재인이나 경제정책의 큰 그림은 결국 비슷할 수 밖에 없을거다.
결국 질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핵심이고, 정부가 공공고용과 공공지출을 통해서 그 역할을 주도해야만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s : 사진은 뜬금없이 Blade Runner의 키스씬. 영화의 여주인공 레이첼에 매혹되었던 기억이 난다. 모 게시판에 등업을 하려면 사진을 링크해야하는 관계로 맥락없이 삽입한다..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초인의 두려움
어제는 압구정에 있는 커피집에 가서 독서를 했다. 맞은 편에 40대-50대로 추정되는 두 명의 아주머니가 앉아서는 대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셨다. 사용하는 어휘와 느껴지는 지식의 수준에 있어서 두 분 다 대학원 이상을 졸업한 부잣집 아주머니로 생각되었다. 두 분은 박근혜를 지지했고, 문재인을 혐오하고 있었다. 대화 내용 가운데 내 귀를 잡아끈 것이 있었는데 이를 적당히 옮겨보겠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혐오해. 그들은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에 대한 입장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 특히 지식인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의 양심을 채우려고 들지. 나는 그런 사람들의 그 위선을 지극히 위험하게 생각해..."
블로그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에 대한 입장이 다르면 그것은 위선일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나도 물론 부자들이 부럽고, 누구 못지 않게 부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가난한 사람이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사회 정의가 실현되었으면 좋겠다. 이 두 감정이 저 분의 말씀처럼 대립되는 것일까? 아니, 나는 이 두 감정이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싫어해 마지않는, 그래서 덩달아 나도 싫어하는 니체가 떠오른다. 니체는 우주는 위대한 소수의 초인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초인에게 세상의 버러지같은 목숨들은 자양분이 될 뿐이고, 그들에게 동정심 따위를 가지면 안된다고 말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담긴 그의 말을 옮겨보자.
"이 모든 조그마한 민중들 모두가 불행을 다 합쳐도, 한 초인의 느낌 가운데 일어나는 불행을 제외하면, 한 총계를 이루지 못한다."
니체는 참회나 속죄 같은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는 그런 것을 순환적 정신착란이라고 불렀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는 기독교를 싫어했다. 기독교의 사랑은 두려움의 소산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니체는 인간이 보편적인 사랑을 순수하게 느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 남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순수하게 남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위의 아주머니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이기적이지 않은, 타인을 위하는 삶을 위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이타심을 가지기엔 너무도 약한, 사실은 두려움에 쫒겨 부를 좆는 약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진보 경제학자들의 말처럼 분배가 더 나은 성장을 이끌 수 있다고 믿지만, 벤담식 공리주의에 입각해서 진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선의가 진보를 지지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속에는 두 명의 영웅이 있다. 버트런드 러셀과 양 웬리가 그들이다. 한 명은 실존했고, 한 명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는 둘 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환생한다면, 이번 대선에서 나와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믿는다.
정치블로그가 아닌데
대선 1주일 전 쯤부터 감정이 동요하더니, 대선 전날에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대선이 패배로 끝난 뒤엔 거의 밤을 샜다. 나조차 몰랐던 어처구니없는 나의 모습. 어쨌든 이 감정이 내 지성에는 연료가 되어서 최근 중 가장 정신적인 활력이 넘친다.
1. 지난 포스팅에서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은 어떻게 보수표를 끌어들일 수 있었는가를 고민했는데, 블로그 리플과 페이스북 등을 통해 좋은 생각들을 많이 접해서, 100% 정답은 아니더라도 의미있는 소설을 한 편 써볼 수 있는 것 같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한 이후, 민주정부 치하의 5년을 겪었다. 마침 진보당은 여당이었고, 여기서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나왔다. 정몽준과의 단일화 이전에는 20%에 머무르던 그의 지지율은 단일화 이후 45%이상으로 치솟았다. 이는 명백히 보수층의 표가 이동한 것이다. 단일화의 과정은 지극히 비정상적이었으나 개의치않았다. 노무현은 탈권위라는 이름으로 더 나은 민주주의의 꿈을 던져주었고, 이미 민주정부 치하 5년을 겪은 40대 젊은 보수층은 고착화되어있지 않았다. 즉 보수당이 아닌 안정을 중시하는 보수층도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변화할 수 있었다. 젊은층의 열광과 함께, 젊은 보수층은 참여정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후의 17대, 18대 대선에서 보수층은 고착화되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에 앞서 이번 패배를 다시금 되돌아보자.
2. 이번 18대 대선에서 문재인은 왜 패배했는가?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한 분석자료는 보스턴 김 사장이 본인의 블로그에 잘 정리해주었다. 아주 덕후스러웠다. 링크한다.
이를 요약하자면,
1) 부산, 경남에서 문재인의 선전이 대구, 경북에서 박근혜의 선전으로 상쇄됨.
2) 수도권, 충청권에서 16대 대선에 비하여 성과가 부족하여 패인으로 보임.
정도가 되겠다. 즉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하면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파격적인 전략이 필요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3. 더불어 나는 요즘 언론의 분석이 두 가지 면에서 틀렸다고 생각한다.
1) 이번 대선은 '보수의 총결집에 의한 패배'가 아니다. 지난 포스팅에 다뤘듯이 보수의 총 표수 자체는 큰 변화가 없다. 17대 대선이 워낙 시시한 선거이기는 했으나 당시에 비하여 18대 대선에서 진보층이 얻은 표수는 무려 700만명이 증가했는데 보수층은 고작 50만명의 증가에 그친다. 이번 대선은 오히려 진보가 총결집한 선거였다. 16대 대선과 비교해봐도 당시 40대(지금의 50대)의 투표율은 76.3%에서 89.9%로 13.6% 상승했지만, 오히려 당시 20대(지금의 30대) 투표율은 56.5%에서 72.5%로 16%나 상승했다. 마지막으로 17대 대선에서 보수가 받은 지지율을 40대(64.4%)-50대(72.4%)에서 거칠게 근사하면 약 68% 내외로 지금 50대의 지지율(62.5%)보다 오히려 약간 높다. 결론적으로 투표율을 감안해도 보수의 결집력이 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2) 그러므로 언론의 분석과는 달리 이번 대선에서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미친 영향력은 결코 크지 않다. 보수가 결집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이번 대선은 여전히 '참여정부에 대한 심판'이었던 것이다. 이는 16대 대선과 17대, 18대 대선을 비교하면 극명히 드러난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은 30대(지금의 40대)에게 62.1%의 지지를 받았으나 18대 문재인은 55.6%에 그쳤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은 40대(지금의 50대)에게 47.4%의 지지를 받았으나 18대 문재인은 37.4%에 그쳤다.
그리고 이 구도는 앞서도 밝혔듯이 17대 대선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인구구조에서의 불리함을 고려할 때, 이번 대선에서 진보가 패배한 것은 전략의 실패이다. 진보 대 보수의 일대일 구도에서는 보수표를 빼앗지 않고선 인구구조상 진보가 이기기 힘들었던 것이다. 젊은층의 투표율을 올리려던 전략은 궁여지책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므로 앞서 지역주의 분석에서 언급되었듯 수도권과 충청권을 사로잡을 전략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들 수도권, 충청권을 사로잡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왜, 무엇이 40대 이후 세대가 참여정부에 등을 돌리게 하였는가이다. 나로서는 두 가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1) 참여정부 시절 정치적 혼란
2)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 교육 정책의 실패
물론 참여정부 시절의 잘못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객관적이지 않다. 참여정부는 여러 성과면에서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1)은 40대의 보수적 정서를 상하게 하였고, 2)는 40대의 실제 삶에 큰 상처를 준 것이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는 이후에 맥을 이어갈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안타깝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등을 돌린 40대는 이후의 17대, 18대 대선에서 보수를 지지했고, 아마도 앞으로의 대선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이들의 마음을 되돌리지 않고선 앞으로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
보수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진보는 더 싫다는 어른들의 흔한 양비론에 숨어있는 정서가 무엇인지 조금은 생각해보게 된다.
2012년 12월 19일 수요일
패배의 분석과 기적의 희망
대선의 후유증이 몰려와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대선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는 글들이 페이스북의 뉴스피드를 장식한다. 진정한 대선 패배의 원인은 무엇일까.
1. 우선 대학동기 L군으로부터 간단한 데이터를 빌려오겠다.
15대 대선 김대중+권영길(10,632,301표) : 이회창+이인제(14,858,309표)
16대 대선 노무현+권영길(12.971.425표) : 이회창 (11,443,297표)
17대 대선 정동영+문국현( 7,550,179표) : 이명박+이회창(15,052,070표) :
18대 대선 문재인 (약 14,500,000표) : 박근혜 (약 15,500,000표)
위 숫자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보수당의 지지층은 그 숫자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15,000,000명 내외로 일정하게 유지된다. 심지어는 IMF가 터진 이후인 15대 대선에서도 보수층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로부터 "지난 정권이 실패하면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는 명제가 깨진다. 보수당의 경우에 정권심판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2) 인물이 보수층에 주는 영향은 분명하지 않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은 전과18범이었으므로 좋은 예였으나, 이회창의 존재로 표가 분산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분명히 알 수 없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는 여성이었으나, 동시에 박정희의 딸이었기 때문에 보수층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없다.
3) 정책은 보수층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는 전통적인 보수당의 스탠스를 버리고 복지를 키워드로 삼았으나 지지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물론 상대적 보수당의 스탠스는 유지했기 때문에 이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2. 이러한 보수 결집의 원인은 무엇일까? 어제 웹을 뜨겁게 달군 어떤 글은 이의 원인이 지역성이라고 규정짓는다. 이의 내용은 보스턴 김 사장이 잘 요약해주었다. 요약하자면 경상도 사람들이 무조건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전라도는 진보당에 90%의 몰표를 주고 경상도는 60-70%를 주지만 인구에서 경상도가 월등히 많기 때문에 보수당이 유리하다. 실제 2011년을 기준으로 한 인구는 대략 아래와 같다.
경상도 (부산, 대구, 울산, 경북, 경남): 1300만
전라도 (광주, 전북, 전남): 500만
충청도 (대전, 충북, 충남): 500만
이는 진보당 후보가 전라도, 충청도에서 100% 득표를 올려도 경상도에서 77% 득표한 보수당 후보와 득표수가 같음을 의미한다. 수도권에도 각 지역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많고, 수도권에서 태어난 지역 연고가 없는 젊은이들의 표를 얻어야만 하는데 이들은 무조건 진보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결국 진보당은 조금만 잘못해도 이길 수가 없고, 보수당은 커다란 잘못을 해도 아주 유리하다.
글의 논지를 인정한다면 진보당이 승리할 방법은 3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1) 경상도의 세대 교체
2) 경상도 출신 대권주자
3) 수도권 연고없는 젊은층의 막대한 지지
3. 이번 대선에서는 세대 간 차이도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20,30대 젊은층보다 50,60대 노년층의 인구수가 더 많은 최초의 선거였다. 노년층의 높은 투표율을 고려할 때, 나같은 진보지지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애초에 이길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한 선거였다. 또한 더욱 우려되는 것은 5년 뒤에는 50,60대 노년층의 인구수가 20,30대의 두 배에 달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자민당 장기집권과 같은 경직된 정치구도가 전망된다.
4. 숫자만 차갑게 바라봤을 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지당은 결정되어있고, 결정된 지지당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가 과거 보수당에게 절대 유리하게 결정되었고, 젊은층 숫자가 적으므로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를 지역인구에 대입해보면 그 결과가 거의 맞아떨어진다. 그러므로 지역인구와의 상관관계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과관계는 이러한 숫자 분석으로 알 수가 없다. 그 점에서 2번 글도 100% 진리는 아니다. 또한 나는 문재인이 이번에 부산에서 40% 지지율을 기록한 것에 주목한다. 이는 노무현 때의 30%에 비해서 높아진 수치이다. 하지만 이 수치가 진보층의 투표율을 높인 것 뿐이라면 큰 의미를 두기 힘들다. 결국 출신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보수층의 표수를 가져오지 못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2번 글의 주장에 대한 반례에 해당한다. 지역성은 중요하지만, 지역출신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수적 스탠스가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여전히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대선결과에서 민주주의의 비이성성을 목격한다. 당장 나도 문재인 의료공약 별로였지만 문재인 지지했다. 왜? 다른 정책 대부분에서 문재인쪽이 더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진짜 이유일까? 정책이 더 이상했다고 내 스탠스가 바뀌었을까? 나는 애초에 진보지지자이다. 이유로 드는 논리는 합리화일지도 모르지. 나이 젊은 나도 이런데 어른들은 다르겠는가. 내 아버지도 박근혜를 뽑은 여러 근거를 말씀하시지만 그게 진짜 원인일까? 나는 박근혜 지지자들의 논리가 얼마나 엉성한지 대선기간동안 충분히 보아왔다. 민주주의는 비이성의 충돌이고, 그 구도가 애초에 불균형하다는게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일 것이다.
내 이런 결론이 더욱 암울한 점은, 진보층에서 전략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1) 경상도 출신이 대선에 나와도 이미 성향이 결정된 보수당 지지자들은 거의 바뀌지 않는 것이다. 2) 또한 75.8%라는 높은 투표율은 고정된 보수층 지지자들의 숫자로 볼 때 거의 진보층 지지자들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지역 간 대결의 구도도, 세대 간 대결의 구도도 불리하다. 결국 보수의 분열 외에는 이길 수 있는 카드가 없어보인다. 결국 안철수가 진보측 대선주자가 되지 않는 한 애초에 승리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딱 한 가지 내가 품고 있는 의문은 16대 대선이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한 것은 해석이 쉽다. 다른 모든 원인보다 이인제로 인한 보수의 분열이 가장 주효했던 것이다. 이인제 때문에 김대중은 승리했다.
그런데 16대 대선에서는 놀랍게도 보수층 지지자들의 숫자가 유의미한 정도로 감소했다. 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정몽준과 노무현의 단일화 때문이라고 봐야할까? 하지만 정몽준을 지지했던 보수표가 저 단일화로 노무현으로 옮겨가는 현상은 다른 대선 결과를 근거로 할 때 일어나기 힘들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이 보수층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무너뜨리며 승리했던 것은 가장 놀라운 불가사의이다. 대체 뭐였을까.
너무 아픈 패배
1. 문재인이 졌다. 참담한 기분이다. 어쩔 도리가 있겠나. 이것이 민주주의란 제도이다. 만인이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는 헌정 사상 최초로 2,30대보다 5,60대 인구수가 더 많았다. 투표율에서도 차이가 나니 애초에 대단히 힘든 게임이었다. (대학동기 L군은 2,30대 투표율이 90%에 달해야만 이번 대선을 이길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2,30대의 투표율을 문제삼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돌이켜보니 인구구조의 문제를 너무 간과했다. 은퇴계층이 생산계층의 미래를 결정짓는 이러한 구도가 바람직하진 않지만, 이것이 제도의 한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2. 지역구도에 대해서는 내쉬균형이 고착화의 원인일 수도 있겠다. 호남도 영남도 섯불리 먼저 열린 마음으로 타 지역정당을 밀어주지 못한다. 호남의 개인이 여당을 지지하려 하거나 영남의 개인이 여당을 지지하려 해도 전체 집단의 경향이 바뀌리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아무도 반대편 당을 지지하지 않게 된다. 결국 캐스팅 보트인 충청도가 양 정당의 정책적 수혜를 가장 많이 누리고, 영남과 호남은 여전히 소외된다.
나는 이러한 구도를 해소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있는 해법은 새로 집권한 대통령이 강한 반발을 이겨내고 반대편 지역에 큰 수혜를 주는 것.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정책이 실행될 가능성도, 실행되어도 지역구도를 부술 가능성도 희박하다.
3. 대통령을 뽑는 것은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하고, 올바르게 분석해야하는 대단히 지적인 작업이다. 그러므로 나는 국민의 반이 지지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선택이 '틀림'이 아닌 '다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의 말대로 대통령을 올바르게 뽑는 것이 어렵다면, 지적인 소수가 선발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버트런드 러셀도 스스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 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맞지만, 실행될 수 없다. 올바른 대통령을 골라낼 수 있는 바로 '그' 지적 능력이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능력을 보유한 이들을 어떻게 골라낼 수 있을까? 지적 능력을 분류해내는 것도, 그러한 지적 능력을 보유한 이들을 뽑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위 문제들은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남게 되며,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최종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나 또한 민주주의에 대하여 소극적인 지지를 할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더 나은 제도는 요원한 것이다.
슬픈 밤이다.
복지에 대한 뻔한 생각
며칠 전에 보스턴 김 사장이 페이스북에서 전체급식/선별급식의 오래된 떡밥을 던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떡밥을 물기 위해 달려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복지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새로이 하게 되더라. 우선 하게 되는 생각은 복지의 목적이다. 복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1) 우선 기회의 평등이란 목적이 있다. 공공교육 등이 이러한 목적으로 정당화된다.
2) 또한 인권의 수호라는 목적이 있다. 극빈층에 대한 지원이 이러한 목적으로 정당화된다.
다음으로 하게 되는 생각은 이상 사회와 현실 사회의 차이이다. 이상 사회(유토피아)에선 기회가 만인 앞에 평등하고, 인권이 보호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 사회를 위와 같이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지향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 목표를 위해 여성이나 아이의 비율을 줄이는 것은 물론 말도 안된다. 반면 장애인이나 빈곤층은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선천적/후천적 장애의 발생을 방지하고, 경제적 빈곤을 해소할 수 있는 안정된 고용과 재분배를 이뤄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 복지의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복지는 늘 대상이 필요하고, 선택의 문제이다.
어린이, 여성, 직장인, 장애인 등 그 대상이 다양한데, 이 중에서 특히 나는 빈곤층과 같은 경제적 계급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경제적 차이가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1) 우선 자연적인 정당성이 없다. 경제적 계급차는 타고난 집안, 재능 등 우연한 요소에 좌우된다.
2) 또한 경제적 차이는 권력의 계급화를 낳는다. 민주주의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가치관에서 출발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권력의 계급화는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3) 마지막으로 계층간 이동이 쉬워야 사회가 역동성과 활력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복지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복지의 예산은 한정적이므로 복지는 결국 선택의 문제가 된다. 무상으로 의복을 제공할지, 급식을 제공할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당연히 더 필요한 대상이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혜택을 누려야만 한다. 결국 경제적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빈곤층에 자원이 더 가야하는 것은 자명하다. 뻔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는 두 가지 디테일이 존재한다.
1) 미국과 같은 선별적 복지. 한정된 자원을 빈곤층에 몰아준다. 계층간 이동을 극대화하는 모델로 사회의 역동성을 추구하는 것 같다.
2) 북유럽과 같은 누진적 복지. 한정된 자원을 전 계층에 나눠주되 빈곤층에 더 많이 준다. 계층간 차이를 최소화하는 모델로 사회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 같다.
결국 보편적 복지/선별적 복지의 캐캐묵은 논쟁은 어떤 사회를 보다 바람직하게 생각하냐는 가치판단을 문제로 이어진다. 미국이 말하는 성공의 희망보다 북유럽이 말하는 평화로운 삶이 나로서는 더욱 마음에 들지만, 경제논리만으로 이를 정당화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양쪽 다 성공적인 모델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무상급식은 전 계층에 하는 것이 좋을까 선별적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너무 애매한 사안이라 정치적인 힘겨루기로 결정될 수 있을 뿐, 뾰족한 판단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 애초에 한정된 정보 하에서 소요가능한 재원도 정확치 않고, 다른 복지와의 우선순위를 정하기도 어렵다. 너무 허무한 결론이지만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결국 나는 시간 낭비를 했단 말인가!
2012년 12월 15일 토요일
영악해진 여성들
최근에 재미있는 기사를 두 개 보았다. 한 기사는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가운데 남녀임금격차가 1위라는 통계내용을 다루고 있었고, 다른 기사는 커피전문점 카드사용률을 조사해보니 남성의 결제가 의외로 더 많았다는 내용이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임금이 39%나 적었고, 커피전문점 카드사용률은 남성이 40%가량 더 많았다.
개인적으로 요즘의 여성들이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걸 발견하고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교감을 나눌 소재가 적어서 안좋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나이차로 인한 생각의 차이는 줄어든다. 어쩌면 20대 후반의 여성이라면 30대 중반의 남성과도 어려움없이 교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여성이 30대의 남성을 선호하는 것은 조금 달라보인다. 이러한 트렌드(?)에 대하여 한 여자 동창은 '요즘 애들은 영악해서 그렇다.'고 말하더라. 의미심장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가치들(돈, 연애경험, 사회적 지위 등)은 많은 부분 30대가 넘어서야 충족될 수 있다. 20대 초반의 여성에게 있어서 또래의 남성들은 높은 접근성을 가지지만, 미래의 가치가 할인된 현재의 잠재가치로 그들을 판단해야만 하는 난점이 존재한다. 또한 20대 초반의 남성이 가진 잠재가치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는 불확실성을 아주 싫어한다. 대부분 남성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20대 초반의 어린 여성들이 30대를 만나는 사회현상에는 합리적인 이유도 존재하는 셈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더욱 영악해졌다.
그렇다면 왜 여성들은 더욱 영악해졌을까? 나는 위의 두 기사가 이에 대한 해답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경제적인 의존도가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직장에서 승진도 어렵고, 봉급도 적고, 안정성도 떨어진다. 결혼을 하면 남성이 집을 해오고, 여성는 훨씬 적은 경제적인 부담을 안는다. 출산, 육아, 교육은 여전히 각 가정에(즉 여성에게) 철저하게 의존한다. 당연히 출산 후 재취업을 하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이니 여성이 좋은 조건의 남성을 만나는데 목을 메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니 더욱 영악하게 연애를 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의존도는 정서적인 의존도를 낳는다. 스무살 이전에는 부모에게, 스무살 이후에는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삶은 독립심이나 책임감 등의 가치를 익히고, 자기주도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
남성이 여성을 부양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이 남성을 부양하는 것도 아니다. 동반자로서 삶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는 이성관계가 지향되었으면 좋겠다.
위 사진의 영화 'Before Sunrise'를 무척 좋아한다. 오른쪽의 여주인공 Celine는 똑똑하고, 사회전반에 관심사도 풍부하면서, 동시에 낭만적인 참 멋진 여자다. 기억에 남는 대사를 옮겨본다.
"you know I believe if there's any kind of God, it wouldn't be in any of us. Not you, or me. but just this little space in between. If there's any kind of magic in this world, it must be in the attempt of understanding someone, sharing something."
좋은 대사다. 사람사이엔 역시 교감이 중요하다.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정치에 대한 잡담
1. 솔직하게 밝히자면 나는 노무현의 팬이다. 이회창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와 의견을 달리하게 된 것도 16대 대선부터였던 것 같다. 노무현은 표정도, 어법도, 걸어온 길도 꾸밈이 없다. 참 선한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사람은 자기와 닮은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도 참 나이브한 사람이다. 너무 느끼는 그대로, 생각하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는 성격이라서, 때로는 그게 지나쳐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나 자신이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난 이런 내가 좋다. 그리고 나처럼 솔직하게 사는 사람이 좋다. 착하고 솔직한 사람이 함께라면 실패하는 것도 괜찮다 싶다.
오늘 처음 본 이 연설 동영상이 참 감동적이다.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의치대출신들은 어려서부터 이익집단 특유의 문화 안에서 성장하고, 교육받는다. 전문직이란 지대(rent)를 가지는 직업군이고, 근본적으로 직업의 이해관계가 정치와 관련이 깊다. 당장 수급과 가격의 결정권을 정부가 쥐고있지 않은가. 의치대출신들이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기 쉬운 이유.
공대출신들도 부유한 사람들이 많지만, 상대적으로 다양한 정보와 문화를 접하며 성장하고, 시장경쟁이 계급적인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최소한 정치문제로 삶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으니까.
얼마전 만난 부유한 유학생 친구가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를 지지한다기에, 미국대선에서는 누구를 지지했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오바마지!"라고 답해서 신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정치성향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역시 개인의 계급적 이해관계.
3. 재미있게도 페이스북에서 정치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 야권을 지지한다. 간혹 박근혜를 변호하는 글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논리가 성글거나 감정적이라 무시되거나 쉽게 반박된다. 어쨌든 인터넷 세상에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들은 대부분 숨어서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다.
어째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들은 대부분 숨어있을까? 간단하다.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딸이, 독재시대의 가치를 안고, 경제민주화를 시대적 과제로 하는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서 나서고 있는데 어떻게 이를 정당화할 수 있나?
결국 실용주의를 표방하는게 박근혜 지지층의 유일한 방법인데, 보편적 실용성은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권을 겪으면서 그 근거를 많이 잃었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근거를 확보하기엔 사안이 어렵고, 차별성이 적다. 결국 개인적 범주의 실용성, 즉 자기가 속한 계급의 이해관계만이 유일한 근거로 남는다. 하지만 이는 공적 공간에서 드러내기가 힘든 것이다.
그래서 박근혜 지지층은 결국 공적인 공간에선 양비론이나 정치혐오를 내세우며 자기의 정치색을 부끄럽게 감춘다. 사적인 공간에서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내세우며 소극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낸다.
난 박근혜 지지자라면 어설프게 정당성을 주장하느니, 솔직하게 계급적 이해관계를 내세우는게 나은 것 같다. 난 솔직한게 좋으니까. 하지만 어찌되었던 그런 보수는 참 멋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2012년 12월 2일 일요일
의무적인 포스팅
1. 벌써 3주 전이다. 지리산 둘레길을 친구들과 다녀왔다. 이틀간 1-3코스를 걸었다. 좋은 경치, 맛있는 식사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친한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 속의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컸던 것 같다. 민박집 아저씨 아주머니는 단돈 오천원에 말도 안되는 성찬을 차려주셨다. 감사합니다.
2. 전에 블로그에 썼던 계획보다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순간순간에는 느끼는 것도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독서의 연속성이 떨어져서 확실하게 내 것이 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남은 시간동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시간을 가져야만 할 것 같다. 이번 달 말이 되면 읽은 책들을 다시금 블로그에 정리해봐야지.
3. 오랫만에 철학의 문제들에 관한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영향을 많이 받다보니 윤리학이나 사회철학보다는 인식론이나 존재론과 같은 주제를 선호한다. 사고훈련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지만, 내용상으로 솔직히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 하지만 실용적이지 않은 이러한 철학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우는데 도움을 얻고있다.
4. 올 한 해를 여자친구 없이 보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다. 올해에 겪은 두 번의 까임;;은 누구 말대로 정말 나에게 가르침을 주더라. 여자에게 거절당할 때, 상대불문하고 그 이유가 거의 같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사실 진작에 머리로는 알고있는 나의 문제점인데,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늘 속해있는 집단에서 어린 축이어서 경험을 무시해왔는데, 최근 몇 년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5. 친한 한의사 친구가 역학에 관심이 많고 사주팔자도 보는 놈인데, 요즘 얘한테 재미삼아 사주팔자를 조금 배우고 있다. 용신(用神)을 해석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지만, 이놈의 해석법이 적어도 내 사주에 한해서는 아주 정확한 거 같아서 참 재미있더라. 나는 경금(庚金)으로 솔직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한 사주이고, 자수성가하여 부를 얻을 팔자라고 한다. 왠지모르게 믿는 나 자신이 어이가 없지만, 내 성격에 계수(癸水)라도 나오면 의심할텐데 하필이면 경금이라니!
6. 12월 한 달 동안 블로그에서 다뤄볼 이야기를 미리 정하자. 죄의 개념, 인식의 방식에 대하여,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순전히 나를 위해서 골라낸 주제들이다. 이번 달 안에 포스팅을 해보자.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