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상처입은 장기말
1. 'Sympathy for the Luddites'는 Paul Krugman의 칼럼 중 최근 가장 마음에 들어온 글이다. 내가 이 칼럼을 페이스북에 링크한지 얼마되지 않아 NewsPeppermint에서도 이 글을 번역했더라. 역시 링크한다.
경제학에 대해서 제반 지식을 쌓아가면서 리카도의 무역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노동자가 장기의 장기말처럼, 바둑의 바둑알처럼 저리 쉽게 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받는 고통은 왜 경제학 이론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혁신은 인류를 진보하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개인은 상처입는다. 그 상처는 개인의 삶에서 영영 치유되지 못할만큼 깊을 때도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상처입은 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다.
뭐 그렇다. 결국 이전 포스팅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성공도, 실패도, 온전히 내 탓이 아님을 깨닫게 될 때 결국 진보주의로 머리와 가슴이 향한다.
정치가 참으로 중요한데, 오늘은 별안간 국가기록원에 대화록이 없다니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2. 오늘 읽은 칼럼 중에는 'Defining Prosperity Down'이 좋았다. Paul Krugman이 10년 전 저서 '기대감소의 시대'에서 한 이야기와 같은 맥락인데, 오늘날의 우리나라 현실도 너무나 잘 반영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칼럼에서 지적했듯, 선거의 결과는 결국 '변화의 정도'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더' 기대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냉소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싫다. 더러운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고, 궁핍한 경제환경도 원래 그런 것이 되는 사회가 싫다. 원래 그런 것이 되는 순간, 당연한 권리를 빼앗긴다. '덜' 기대하고 살아가게 되버린다.
관사의 밤은 포근하다. 오랫만에 운동을 격렬히 했다. 내일은 조금 쉬엄쉬엄 보내는 것도 좋겠다.
2013년 7월 13일 토요일
제비뽑기와 분배의 정의 2
오늘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축가를 했다. 이번 달에만 두 번째 축가였다. 친구의 소중한 기억의 일부로 기억된다는 건 참 보람있는 일이다. 가사를 새겨듣는 친구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행복하기를 바란다.
어제 블로그에 포스팅한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다지 새로운 내용도 아니면서, 다양한 생각의 줄기를 정돈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늘어놓았다. 그래도 조회수가 몇 십이 나오는데, 형편없는 글로 오시는 분들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어제의 글을 지우고 새로 쓸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보다는 생각을 정돈하여 추가로 글을 작성하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어제 이야기한 교육 이야기는 내가 블로그에서 여러번 이야기한 주제이다. 이전 포스팅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로스쿨 제도는 실패했나? 2) 문재인의 고용정책과 교육정책
1. SAT는 학업 성취도와 상관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엔 표준 편차가 크다. 특히 SAT만을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한다면, 작은 점수 차이로 많은 학생들이 갈리기 때문에 더 나은 학생이 기회를 잃을 수 있다. 그러나 1) 다른 복잡한 선발 방식을 도입하면 기득권층이 더 유리해지는 경향이 있다. 애초에 SAT가 도입된 배경이 그것이다. 한편, 2) SAT로 인한 학업 성취도를 인정하더라도, 그마저도 기득권층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전적, 환경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논의는 유전적인 불평등과 환경적인 불평등을 각각 어디까지 인정하는 사회가 바람직한가 하는 주제로 확장될 수 있다. Michael Sandel 교수는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John Rawls의 '무지의 장막'을 근거로, 환경적인 불평등은 축소하고, 유전적인 불평등 역시 그것이 사회의 전체적인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에 한하여 인정하자는 주장을 소개한 바 있다. 나도 이 점에 동의한다.)
수능의 경우, 우리나라의 입시에서 SAT보다 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므로 부작용도 더 크다. 한 두 문제의 실수 때문에 입학이 가능한 대학이 확 달라지게 되는 것은 그다지 공정해보이지 않는다. 다른 다양한 선발 방식이 도입되는 것을 일부 인정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와 마찬가지의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사법고시와 같은 전문 시험마저도, (수능보다는 낫더라도) 법조인으로서 요구되는 모든 능력을 제대로 평가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선발을 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1) 나중에 성공할 사람을 뽑거나, 2) 현재의 능력을 더 정확히 가늠하는 수 밖에 없는데, 1)을 중시하면 기득권에 더욱 유리하다. 좋은 배경만큼 막강한 성공요인은 없기 때문이다. 2)를 중시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의 능력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결국 선발 제도의 목적을 1) 우수 인재 선발에만 두게 되면, 한계가 명확하다. 더 나아가 2) 계층 간 이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확대해야만 한다.
SAT나 수능, 사법고시와 같은 다양한 선발 제도를 위 1),2) 두 기준으로 평가하면, 보다 다양한 계층의 우수한 인재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인재로 성장하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2. 공교육의 부실이 사교육 시장을 키운 것은 아니다. 사교육은 시험 제도가 존재하면 형성되는 특성이 있다. 사교육은 학생 집단을 '솎아낼 때' 발생한다. 입시에서의 경쟁이 사교육의 발생원인이고, 이는 근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므로 공교육이 강화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교육에서 교육의 효율성을 위해 특목고 제도와 같은 차등 교육을 실시하고 있기에 발생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교육의 효율성 추구가 사교육이 성장할 토양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교육의 부실이 사교육 시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사교육 시장이 팽창해서 오늘날 공교육이 소외되었다는 것이 원인과 결과를 맞게 분석한 것이다.
이 주제는 내 수준에서 이 정도면 되었다. 이제 다른 주제로. 사진은 경리단길의 샌드위치 집 '뽀르게따'의 사진. 개인적으로 요즘 경리단길이 참 매력적인 거 같다. 다른 블로그에서 긁어 편집한 사진이라 죄송하다. 블로그에 올릴 사진을 직접 찍고 다녀야하나..
2013년 7월 12일 금요일
제비뽑기와 분배의 정의
1. 지난 주말에 대형로펌에 근무하는 변호사 분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김앤장을 창업한 두 명의 변호사 중에 장 변호사는 은퇴했지만, 김 변호사는 아직도 근무를 한다고 한다. 그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일을 할 때면 번쩍이는 천재성을 보여준다고.
그런데 그 김 변호사의 아들도 사법고시를 패스하지는 못해서, 여러번 낙방한 끝에 지금은 미국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조인이 되었다고 한다. 김앤장 창업자의 아들도 사법고시를 패스하지 못하면 김앤장을 물려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법고시 제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동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고.
과거 로스쿨 제도와 사법고시 제도에 대해 지인들과 의견을 나누고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로스쿨 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에 가까웠지만, 요즘은 비판하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2. 흔히들 수능이나 사법고시 같은 시험 제도를 옹호하는 이들은 미국에서 SAT가 도입된 역사적 배경을 짚는다. SAT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각 학교의 GPA를 동일하게 비교할 수가 없었고, 학생들의 성적을 표준화할 수 없었기에 각종 부정을 통해 기득권층이 상류 대학에 합격하기가 유리했다. 때문에 보다 단순하고 표준화된 기준을 가지고 학생들을 평가하기 위해서 도입된 시험이 SAT이다. 결국 SAT는 학생들의 성취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SAT점수가 학생의 성취도에 대한 참된 기준이 될 수 있을지는 많은 의심을 받아왔다. 객관식20% 주관식80%의 시험과 객관식80% 주관식20%의 시험은 그 결과가 아주 다를 수 있다. 시험이 서술형이라면 또 어떨까? SAT가 표준화는 시킬 수 있을지언정 공정한 평가라는 근거는 어디있는가?
아마도 SAT는 일반적인 지적 능력과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가늠할 기준은 될 수 없다. 수능도 그런 점에서는 SAT와 비슷한 장점과 한계를 가질 것이다.
보다 전문적이라곤 해도 사법고시 역시 비슷한 문제점을 가진다. 어쩌면 사법고시 점수와 법률적 지식은 높은 상관관계를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의 성취는 또 어떠한가. 사법고시 점수가 고시생들의 미래 가능성까지 평가할 수 있을까? 사법고시 점수와 법조인으로서의 성취를 분석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우리는 결코 다른 이를 정확히 평가할 수 없고, 그들의 미래 가능성은 더더욱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3. 미국의 대학들은 차츰 SAT의 비중을 줄였다. 위에 언급한 SAT의 한계가 많든 적든 이의 근거가 되었다. 조기 입학 제도 등의 다른 전형이 도입됐다. 미국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소수 집단 우대정책 등이 도입되었고, 이 역시 SAT의 권위를 약화했다. 여러가지 전형들은 대학 입시에 각기 다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전체적으로 종합해 본 결과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여전히 기득권층이 명문대에 입학하기 쉬웠다. 2010년도에 나온 관련 기사를 링크한다.
요약하자면, 각 대학들은 조기 입학 제도와 같은 방법으로 SAT의 비중을 줄여 더 많은 부유층을 합격시키고 있으며, SAT 자체마저도 사실은 빈부격차와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2010년도 SAT 성적을 따져보면 최저 소득 계층과 최상류층 간격은 SAT 논술(critical reasoning)에서 130점, 수학에서 80점, 에세이에서 70점씩 차이가 났다. 아마도 유전적인 요인과 환경적인 요인이 아울러져 이러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 같다.
4. 선발 제도의 목적을 우수 인재 선발에만 두는 건 사실상 교육의 양극화를 용인하고 묵인하는 것이다. 어느 학생의 능력이 보다 우수한지 분명히 골라내기가 어렵다면? 당연히 더 배경이 좋은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대학의 입장에선 유리하다. 배경만큼 학생의 성공가능성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척도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대학에 많은 기부금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방식이 좋아보이지 않는다.
선발 제도의 목적을 1) 우수 인재 선발과 함께 2) 계층 간 이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확대하면 어떨까. 지금껏 우리 사회는 늘 우수 학생을 선별하는 것만이 입학 제도의 본래 목적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다양한 방식의 입학 제도는 사실상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고, 단순화된 시험 제도마저도 학생들을 올바르게 평가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우수한 이를 가릴만한 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정한다면, 선발 제도는 제비뽑기와 같은 성격을 지녔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기회의 분배에 좀 더 방점을 두는게 좋지 않을까?
5. 오랫만에 긴 글을 쓰려니 힘이 든다. 다양한 사례들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형이 MBA를 준비할 때 나에게 해 준 이야기인데, essay가 아주 중요한데, 이를 대신 써주는 업체가 있다고 한다. 글로벌한 업체인데 우리 돈으로 1500만원인가 든다고. 재미있게도 정말 그 업체에 essay를 맡기면 합격률이 상승한다고 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요즘 운전하면서 '나는 꼽사리다.'를 뒤늦게 듣는다. 어제는 사교육 편을 들었다. 인상깊었던 몇 가지.
1) 공교육의 부실이 사교육을 키운 것은 아니다. 사교육 시장은 하위50%가 아닌, 상위50% 학생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더' 잘하기 위해 경쟁한다. 사교육 시장이 팽창해서 공교육은 소외되었다. 결국 사교육이 공교육 부실의 원인이다.
2) 시험 제도가 존재하면 사교육 시장은 형성된다. 우리나라에 비해 사교육 시장이 훨씬 작은 미국도 SAT나 각종 전문 시험은 사교육 시장이 존재한다.
6. 오늘의 내용을 통하여 삶의 규율을 세우자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시험에 합격했다고 너무 기뻐할 일도 아니고, 떨어졌다고 너무 좌절할 일도 아니다. 물론 합격했으면 자랑스러워 할 만하고, 떨어졌다면 반성해야만 한다.
시험 제도에 대해 합리적으로 고민한 끝에 나오는 도덕적 결론이 아주 건전하고 실용적이라 좋은 것 같다. 아, 사진은 내 방이다.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근황
하바코시나(Habacocina)는 스페인어로 빙수라는 뜻이라고 한다. 최근 신사역 근처에 생긴 빙수전문 카페의 이름이다. 사장님이 대학원 동기, 고교 선배의 절친이라니 나랑 알게 모르게 인연(?)이 깊다. 지난 주에 처음 방문했는데, 팥빙수가 아주 맛있었고, 인테리어도 좋았다. 무엇보다 카페의 시그니처가 참 매력적이더라. 흑인의 감성이 느껴지는 그림인데, 스페인어 이름과도 멋지게 어울린다.
완연한 여름이다. 여름은 빙수의 계절이다. 빙수는 우유 얼음에 통팥이 역시 제일이다.
블로그를 쉰 지난 한 달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집이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를 갔다. 10년 간 성북구에 살았고, 20년 이상 강북에서 살았다. 박원순 시장님의 품을 떠나, 김문수 도지사님의 통치를 받게 되었네.
새로 지어진 단지라서 건물도 새 것이고, 공원도 잘 되어있고 무척 좋다. 서울과 멀어진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부모님 두 분이서 노년을 보내시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을듯. 내 방도 마음에 든다 하하.
우리나라도 지난 한 달간 너무나 박진감 넘치게 돌아갔고, 지금도 정치권은 연일 홈런이다. 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인 것 같아.
'가을방학 - 근황' 아름다운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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