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4일 화요일
신의 유무에 관하여
내가 처음 철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으면서부터이다. 책 안에는 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위해 내세우는 갖가지 증명들을 논박하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철학 전반에 대해 공부를 시작한 뒤론 신의 유무에 대해서 금새 흥미를 잃었다. 대단한 논쟁거리도 아닌 것 같고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이 난 논의로 생각되어서이다. 나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라도 신의 존재를 믿기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할 거라고 생각한다.
벌써 꽤 지났지만, 차별금지법안이 보수 기독교인의 반대로 철회되면서 이 주제에 대해서 새로이 포스팅을 하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존재론적 증명 2)우주론적 증명 3)목적론적 증명 이 그것이다. 이들을 하나하나 정리해보자.
1)존재론적 증명은 다음과 같다.
존재와 성질을 놓고 볼 때, 유한한 실체의 경우 그 성질은 존재를 뜻하지 않는다. 가령 햄릿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우울하고 우유부단하다는 성질을 가진다. 그러나 신의 경우에는 가장 완전한 성질을 가졌고, 따라서 성질이 존재를 내포한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더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이 주장은 신을 완전한 존재로 정의하고, 다시 이 정의를 근거로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는 순환논증이 되고, 제대로 된 증명이 아니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더 완전하다고 볼 이유가 없어보인다.
칸트는 애초에 엄밀한 의미의 존재란 술어(述語)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A는 B이다 라고 말할 때 A가 주어, B가 술어가 된다. 그런데 이 문장이 성립하려면 B의 내용과 무관하게 A는 (가정적으로나마) 존재해야만 한다. 즉, 주어는 존재를 내포한다. 극단적으로 'A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보자. 이 문장은 A라는 주어가 존재하지 않으면 쓰여질 수가 없으므로 항상 거짓이 된다. 존재하지 않는다 가 참이 되려면 그 의미가 제한되어야 한다. '햄릿은 (실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은 소설 속의 햄릿을 '존재'의 정의에서 제외했으므로 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문장을 쓸 때에는 무의식 중에 이와 같은 제한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주어는 늘 존재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증명은 그 형식에서부터 문제점을 갖는다.
2)우주론적 증명은 과거 내가 포스팅한 적이 있는 제1원인론과 같다. 링크한다.
3)목적론적 증명은 역사가 깊은 것이다. 자연을 관찰하면 신이 부여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러므로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인데, 앞서의 두 논의와는 달리 귀납법의 형식을 취한다. 이 증명은 형식상의 결함이 없으므로, 경험적으로 반박해야만 한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이 증명 역시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결론이 난 것 같다.
러셀의 재미있는 예가 기억이 나는데, 러셀에게 어느 귀족이 토끼의 귀가 긴 것은 사람이 잡기 쉽게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러셀이 그에게 그렇다면 벼룩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냐고 되물었고, 그 귀족이 크게 성을 내고 갔다고.
주의할 점은, 위의 세 가지 증명이 모두 부인되었다고 해서 신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는 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인 것이다. 사실상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 못지않게,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신이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결론으로 삼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귀납적인 검토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인간과 유사한 도덕관을 가지고, 인간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인간과 똑같은 생김의 아들을 지구로 보낸 신이 존재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선한 이는 죽어서 천국에 보내주고, 악한 이는 죽어서 지옥으로 보내는.
오늘날까지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우주는 어마어마하게 넓고, 지구와 유사한 외계 행성도 무수히 많을 것이며, 외계인도 존재할 거라고들 말한다. 나는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신이 존재할 가능성은 너무나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믿을 수가 없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이 어째서 탄생했는가에 대한 러셀의 비유가 있다. 계란 한 판이 있는데 그 절반만 열어보니 계란 전부가 썩었다고 하자.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나머지 절반에도
썩은 계란이 많으리라 추측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달리 말한다. '아니야 나머지 절반은 싱싱한 계란이 있을거야.' 현실세계에 대한 보상이 사후에 내려지리라는 기대는 위와 같은 것이다. 선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도 유사한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근대에 와서 기독교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론적인 공격에 반격했다. 베이컨은 이성과 계시를 구분해서 '이중의 진리'를 주장했다. 신학의 여러가지 문제는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이성만 가지고서는 교리가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경우에 신앙의 승리는 가장 큰 것이다." 당연히 이는 궤변적인 주장이다.
루소 이후로는 '믿음'을 앞세운다. 루소는 말한다. "믿고 안 믿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나는 다른 진리와 마찬가지로 신을 굳게 믿는다." 이런 개인적인 믿음을 타인에게 정당화하여 선교할 수 있을까?
결국은 점점 실용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종교가 나아가는 것 같다. 파스칼의 주장이 그러하다. 믿으면 죽고나서 천국에 갈지도 모르니 믿자고. 현대에 와서는 윌리엄 제임스가 유사한 주장을 했다. 믿었을 때 여러가지 결과가 더 이로울 것이라고. 그렇다면 역시 실용적인 측면에서 현실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이에 대응하는 방법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차별금지법 철회는 기독교에 비판적인 나로서는 좋은 예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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