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철학이 필요없다는 철학



 절친한 친구 한 명과 이따금 논쟁하곤 하는 주제가 있다. 이 친구는 모든 가치의 우열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일종의 회의주의인데, 이 친구는 원자화된 개인의 욕구가 끊임없이 충돌하지만, 결코 어떠한 보편성도 기반으로 확보될 수 없는 무질서한 곳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 친구에게는 살인도 죄가 아니다. 물론 죄라는 개념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합리가 비합리보다 우월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의무도 허구이다.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권리도 역시 허구라고 주장할 것이다)

 친구의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여지껏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의 주장 전부가 사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누구나 '존재한다.'는 것 이상의 정보를 확신할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수많은 감각정보에 의해 유추된 것이다. 개인이 직접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들은 이러한 감각들 뿐이다. 세상이 내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존재하고 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호접지몽에서 그러했듯, 내가 단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앞서 '흄의 철퇴'라는 블로그 포스팅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자극에 반응하고, 사고를 형성하는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험적 지식들은 결코 어떠한 확실성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서 개연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단지 그리 믿지 않으면 더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연역적 지식은 소급해 올라가면 궁극적인 출발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개연성과 같은 몇  가지 원리를 연역적 지식의 머리에 둔다. 우리가 사고를 형성하려면 몇 가지가 더 필요하다. 가령, 모순율이 그렇다. 또 'A=B이고 B=C이면 A=C이다.'와 같은 명제도 사실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 외에도 더 있지만 이만하자) 이러한 것들이 어째서 사실인지 더이상 따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들 원리들을 받아들여야 연역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방황하는 윤리'라는 포스팅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듯이, 많은 윤리문제들이 사실상 취향의 차이이다. 어떤 이는 사람을 죽이는 걸 좋아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법을 어기고 싶어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할 수 있다. 생득되는 윤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무'나 '권리'의 개념을 버리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단지 취향의 차이가 되어버린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참 재미있는 게, 하늘 아래에 새로운 게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2천년 전에 그리스에서 비슷한 주장을 한 철학자들이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의하면, 이 회의주의 철학은 아주 당연히 철학과 거리가 먼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게으른 사람들의 자기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철학이 필요없다는 걸 주장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친구는 일체의 보편성을 거부하고 원자적 개인에 머무르려 한다. 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그러한 욕구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선호를 타인에게 설명할 수는 있지만, 어떤 보편성에도 호소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욕구들이 사회 안에서 보편화되어 규율이 형성되는데, 그 자신은 일체의 규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절친한 지인에게 자신의 선호를  존중해줄 것을 부탁할 수 있다. 지인은 그를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일면식도 없던 살인마를 만나면 그는 단지 '저는 죽고싶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다. 결코 '살인을 하면 안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살인마는 그의 선호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세상만사에 대해서 '이것이 옳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 옳은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이것이 좋다.'라고만 말할 수 있다. 별난 결론이다.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주장은 단칼에 모든 고민을 해결해버리는 시원함이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면 그는 세상을  향해 어떠한 적극적인 주장도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양한 사회집단에게 단지 자신의 '선호'만을 호소한다면, 개인적 인간관계의 울타리 밖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들은 소극적으로 자기보호를 얻는 것에 만족한다.

 친구는 나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윤리의 기원에 대한 견해도, 인식론에 대한 견해도 큰 그림에서 유사하다. 그럼에도 아주 작은 관점의 차이에 의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취향의 차이가 회의주의를 낳고, 이 회의주의는 합리마저도 부정하기 때문에 설득될 수도 없다. 결국 개인이 가진 욕구만이 남으므로, 감정에의 호소가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역사를 보면 특정 시대의 정서가 특정 시대의 철학을 낳곤 한다. 개인의 정서도 그에 알맞은 철학관을 낳는다. 회의를 바탕으로 원자적 감정의 세계로 피신하는 개인이 품은 중심정서란 무엇일까. 나에게 이는 극복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이 또한 나의 취향임은 부정할 수 없다.

p.s : 사진은 이촌동 미타니야에서 먹은 카레라멘. 나는 일식 중 카레라멘이 제일 좋더라. 아.. 카레!

댓글 2개:

익명 :

모순율이나 배중률처럼 논리학의 기본 법칙들도 현대에 와선 진리라고 여겨지지는 않죠. http://m.blog.naver.com/zhrlxh/120168851467 어떤 범위를 설정했을 때 그 범위 안에서 성립한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Spiritz :

익명 님 이 블로그는 버려두고 있어서 이제야 봤네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링크해주신 글 재밌게 봤어요. 불완전성 정리가 저런 내용이군요. 허허.. 하여간 대단한 사람들 참 많아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