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6일 일요일

삼류인생을 사는 법





1. 어제는 대학원 동기들과 이태원 해방촌 쪽에 있는 햄버거 뷔페를 갔다. 햄버거를 뷔페로 팔다니.. 햄버거 패티만 네 장을 먹었더니 속이 느글거려서 밤잠을 설쳤다.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동기들을 만나면 아무래도 그들이 들려주는 병원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의국 식구들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교수님들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어제는 연세가 많이 드신 노교수님 이야기가 잠시 나왔다. 노교수님은 병원 의료진과 학생들의 복장상태에 예민하셨다. 직원들은 간호복, 의사와 학생들은 깔끔한 정장과 넥타이, 깨끗한 가운을 입도록 단속하셨다. 학생 시절 병원에 실습을 다니고 있을 때, 내 가운이 더럽다며 나를 불러서 주의를 주신 적도 있다. 나는 워낙에 삐딱해서 병원에 좋아하는 교수님이 별로 없었다. 이 분도 예외는 아니라서, 늘 복장가지고 트집을 잡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제 동기 한 명이 말했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신경을 쓰는게 어디야."라고. 듣고 보니 그렇다. 역시 연로하신 다른 한 교수님은 학생은 커녕 전공의들에게도 관심이 전혀 없었다. 전설같은 이야기로, 전공의 말년차에게 어느날 이 교수님이 "너 몇 학년이냐?'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더라.

 이공계에 있다가 치과계로 오니 재미있는게, 이 쪽 교수님들은 자녀들도 치과의사로 키우는 경우가 많더라. 꼭 교수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의사계통이면 자식도 비슷한 전공을 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반면에 이공계에 다닐 적에 우리 과에서 가장 잘나가는 교수님도 딸은 의대로 보냈다고 들었다.
 아무튼 어제는 처음에 얘기한 그 노교수님의 아들 이야기가 나왔다. 아들이 치과의사인데 이번에 우리 병원 인턴으로 들어왔다더라. 여러가지 정황상 노교수님의 힘으로 우리 병원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있다.
 올해만 비슷한 이야기를 여러차례 들었다. 한 노교수님 아들은 군의관으로 군복무 중인데 최근 교수님 연구실에서 발표한 좋은 논문의 제1저자가 되었다더라. 연구실에서 직접 그 실험을 주도한 연구원은 알면서도 눈감아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 노교수님은 수업 시간이면 늘 큼직한 교재를 한 손에 안고 교실문을 들어오셨다. 매년 첫 수업날이면 학생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요즘에도 이 책을 계속 다시 읽고 있습니다." 나야 워낙에 시니컬해서 특별히 인상깊지도 않았지만 저 말씀에 감명받은 동기들이 많았다.

이런 일들이 의과나 치과에서만 벌어지는 건 물론 아니다. 내 대학 동기도 자기 연구실 선배의 논문을 대신 써주다시피 했다. 실험도, 논문 작성도 거의 전부를 했다. 그 논문이 좋은 학회지에 실리면서 그 선배는 지금 지방의 한 대학 교수로 갔다. 이 부정에 대한 책임이 있는 그 친구네 담당 교수님은 늘 80년대 배고픈 시절에 라면을 먹으며 실험실에서 밤을 지새우던 이야기를 하셨다. 요즘에는 교회를 다니시더니, 그렇게 성경책을 안고 다닌다고 들었다.


2. 엊그재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가 장안의 화제더라. 믿기지 않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연히 살아가는 재벌가 사모님의 이야기가 놀라웠다. 뒤늦게 뉴스를 읽고, 사건을 담당했던 한 변호사님의 블로그도 들어갔다. 그 변호사 분은 문학적 소양이 깊으셔서, 수필이나 소설 형식의 글들을 왕성하게 포스팅하고 계시더라. '판사 여자 살인사건'이란 제목으로 '그것이 알고싶다'에 방영되었던 사건의 재판 후일담이 약간의 각색(fiction)이 가미되어 포스팅되어 있었다. 몇 번이나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읽었다.
 '판사 여자 살인사건'을 다 읽곤, 변호사님 블로그에 담긴 다른 수필들을 읽었다. 사람과 법정, 나이듦과 삶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가슴을 적셨다.

 지독히 게으르고 무책임한 어떤 교수님은 가족을 잘 돌보고, 전공의들과 아주 인간적으로 교류하더라. 대한민국 최고의 명의인 다른 교수님은 그 자신의 건강과, 가족의 행복을 환자와 맞교환한 것만 같다. 아주 낭만적인 연애관을 가진 어떤 지인은 자주 나이트클럽에 가서 원나잇을 한다. 어제는 애인을 9년째 사귀고 있다던 한 친구가 바람을 피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세상이 흘러가는 원리가 뭔지, 사람이 산다는게 뭔지 한 해 한 해 배워가고 있다.

 '삼류인생의 행복'이란 포스팅에서 변호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대법관 같은 고관직을 지낸 변호사를 일류로 본다면 나는 삼류가 맞다. 엄청난 돈을 벌어 부자가 된 걸 기준으로 치면 사류쯤 될까.'
 세월이 흘러 나이를 더 먹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어떨까. 아둥바둥 살아봤자 나도 누군가에겐 그저 삼류인 인생이다.
 욕심을 놓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요즘의 나에게 큰 위안이 되는 블로그를 발견했다. 이 기쁨으로 또 한동안 즐겁게 지낼 수 있겠다.

댓글 2개:

anankaion :

1. 크록스 금지하시는 분들도 계시죠. 교수님 당신이 신으시는 구두 같은 걸 신었다간 무좀 티눈 등으로 고생하게 될게 불을 보듯 뻔한데 그런건 아웃오브안중

아무래도 부모가 의대교수란 조건이 개원을 하든지 학계로 나가든지 의사로서 가질 수 있는 여러 특권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경영이 안 좋은 개원의나 교수가 아닌 분들의 ‘내 자식은 한국에서는 절대 의사 안 시키겠다.’ 라는 얘기도 종종 들었거든요) 사실 부모가 공대교수라고해도 자녀에게 직접적으로 챙겨줄 수 있는 건 그렇게 많지 않은데 반해 의대는 소위 로얄이라 불리는 교수자녀들이 레지던트 지원부터 시작해서 교수임용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게 워낙 많잖아요. 다른 학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학교만 해도 욕나오는 추잡한 사례들이 있고 심지어는 여기에 더해서 뒷구멍이라 불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입학에까지 힘써줄 수 있는데 안 시킬 이유가 없겠죠.


2. 엄상익 변호사님 블로그 보셨나보네요. 개인적으로는 글에서 묻어나는 신앙이 가끔 불편하지만 좋은 글이 많죠. 저는 몇 년 전에 엄변호사님 블로그에서 여대생 살인에 관한 글을 여러번 읽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것이 알고싶다.’ 보면서 기분이 묘했어요. 괜히 저랑 실질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건 같은 느낌? 게다가 실제로 마주친 적은 없지만 우리학교 외과교수가 허위 진단서 작성까지-_-;

욕심을 내려놓으면 좋을 텐데 그게 참 말은 쉬운데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 스타트업 같이 하던 선배가 회사를 잘 돼서 미국에도 진출했단 얘기를 듣고 회사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는데 세상을 바꾸겠다더니 진짜로 영향을 끼치는 그 모습을 보니까 아는 사람이 성공해서 기쁜게 아니라 스스로가 초라해 보이면서 꿈도 자신감도 없어서 도망친 것 같단 생각에 난 뭐지 하면서 열등감 폭발...

Spiritz :

anankaion/
1. 학생시절보단 복장단속을 이해합니다. 몸이 아프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병원을 찾는데, 그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이 저를 만나는 건 극히 짧은 순간 뿐이라.. 보수적으로 입는게 맞는 거 같아요. 개인병원이라면 원장의 개성이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도 있겠지만 병원은 다르니까요.

그렇지만 애초에 흰 가운과 정장, 넥타이, 구두가 의사라는 직업에 걸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흰 가운은 잘 더러워지고, 넥타이는 전혀 위생적이지 않죠. 더군다나 치과의사는 몸을 많이 쓰는 직업인데 너무 활동성이 떨어지고 갑갑합니다. 말씀대로 크록스 정도의 신발도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는 공직에 뜻이 있는게 아니라면, 의대교수보단 개원의 부모가 훨씬 이로울 거 같은데 아닐까요? 아무튼 의대는 성적이나 선발 등에 잘못된 개입이 이뤄지기 너무 쉬운 구조같아요. 비리에 대단히 취약합니다. 요즘 고교 과정이 다양해지고, 대학 입시가 복잡해지면서 각종 비리나 사교육이 폭발하는 것과 비슷한 거 같아요.


2. 저도 욕심이 굉장히 많아요. 참 직관적으로 살아온 삶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중심을 잡기가 힘드네요. 2년 전 병원선에서 근무할 때, 배 위에서 가만히 누워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벤처회사를 차린 지인들이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저는 돌이켜보면 대학시절 꿈이 없었다기보단, 너무 허무맹랑했어요. 그렇게 철이 없었습니다. 요즘도 비슷해요. 대학원 다니는 내내 철학책만 들입다 팠는데, 아직도 놓지를 못합니다. 이게 제 커리어를 다르게 만들어 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냥 좋아서 하는 겁니다. 하필이면 이게 좋은 것도 팔자다 싶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