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7일 수요일

현실과 낭만 사이

(스포일러 있습니다)

 Woody Allen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의 영화는 주제가 뚜렷하고, 군더더기없이 이를 다룬다. 재기발랄함과 따뜻한 시선이 있다. 거대한 서사시보다는 유쾌한 단편집을 한토막 읽는 기분과 비슷한 것 같다. 내 취향이다.

1.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Vicky Cristina Barcelona)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현실과 낭만을 대비하며 다룬다.
 현실적인 성격의 비키와 낭만적인 성격의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 여행을 가서 매력적인 화가 후안 안토니오를 만난다. 비키는 안토니오의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고, 여행을 마친 뒤에도 온전히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크리스티나는 안토니오, 그의 전처 마리아와 동거를 하는 과정에서 사진작가로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낭만의 시간은 짧고, 크리스티나는 현실로 돌아올 때임을 깨닫는다. 비키 역시 안토니오를 잊지 못하고 그를 찾아가지만, 안토니오와 마리아의 다툼을 목격하곤 두려움에 압도되어 달아나버린다.

 감정은 요동친다. 격해졌다가 이내 가라앉기도 한다. 하나의 감정이 다른 감정으로 번지기도 한다. 사랑을 감정이라 한다면, 사랑은 지속되기 힘든 촛불과 같은 것이다. 가끔은 활활 타올라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때도 있지만, 그럴수록 결국엔 한줌 재로만 남아 사그라질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성격의 비키는 말할 것도 없고, 낭만적인 성격의 크리스티나마저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들이 돌아온 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각박한 스케쥴, 고층 빌딩, 빼곡한 일거리가 쌓여있는 미국의 도시일 것이고, 돈을 잘벌지만, 성적매력이 없는 비키의 남편일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을 보자. 미국의 도시는 그들이 바르셀로나로 휴가를 떠날 수 있는 수입과 삶의 터전을 제공했다. 비키의 남편은 능력있고 다정하다. 그와 함께면 감정의 들썩임은 덜할지라도, 따뜻한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2.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약혼녀 가족과 파리로 여행을 온 소설가 길은 현실과 낭만 사이에서 내적인 갈등을 한다.

 길은 미국에서 꽤 팔리는 시나리오 작가다. 예쁘고 부유한 약혼녀도 두고 있다. 하지만 길과 약혼녀의 관계는 다소 피상적이고, 그는 상업작품을 접고 순수문학을 하고 싶다. 그는 1920년대 파리를 황금시대로 여기는 몽상가이다.
 어느날 그는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다가 환상적인 여행을 통해 1920년대 파리에 도착하고, 헤밍웨이, 피카소, 스캇, 달리 등과 교류한다. 그리고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인 아드리아나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또다시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서 아드리아나가 생각하는 황금시대인 1890년대로 도착한다. 아드리아나는 그곳에서 로트레크, 고갱 등을 만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길은 낭만적인 과거는 불만족스런 현실로 인한 도피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실로 돌아온 길은 약혼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파리에 머무르며 새로운 삶과 사랑을 찾는다.


3. 지난 주에 얼마전 결혼한 친구와 부산 해운대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아침에 리조트 창 밖에 보이는 바다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씨앗호떡, 스시, 아구찜, 슈크림 빵도 맛있었다. 늘 그렇듯 친구와 이성문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미난 일화가 생각난다. 친구는 해운대의 집값이 서울보다 싸니까, 집을 마련해서 미녀를 꼬시기 서울보다 쉽다고 주장했다. 나는 해운대가 서울보다 집을 마련하기 3배 쉽더라도, 부산 미녀의 수가 서울의 1/3에 불과하므로 기대값은 3*1/3=1 동일하다고 응수했다. 친구는 정말 나다운 사고방식이라고 말하더라.

 사랑은 일종의 개시제(initiator)이며, 촉매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무나 클레오파트라가, 양귀비가 될 수는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 현실적인 계산만으로 맺어진 관계는 시작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하지만 낭만적인 감정을 현실보다 앞세워서도 안된다. 감정의 거품이 걷어지면 참담한 현실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현실과 낭만 사이 어디쯤에서 균형점을 잡아야만 할까. 영어를 잘하는 여자에 대한 환상을 내가 어느 지점에서 포기해야 할까? 예술을 하는 여자에 대한 환상은? 키가 큰 여자에 대한 선호를 굳이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패션 센스에 대한 선호는 또 어떠한가?
 어디서도 답을 구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 우유부단한 몽상가 길도 황금시대로부터 현실로 돌아와, 약혼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선택을 해냈다. 길은 어떻게 그런 과감한 선택을 했을까? 또다시 답이 없는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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