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초인의 두려움
어제는 압구정에 있는 커피집에 가서 독서를 했다. 맞은 편에 40대-50대로 추정되는 두 명의 아주머니가 앉아서는 대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셨다. 사용하는 어휘와 느껴지는 지식의 수준에 있어서 두 분 다 대학원 이상을 졸업한 부잣집 아주머니로 생각되었다. 두 분은 박근혜를 지지했고, 문재인을 혐오하고 있었다. 대화 내용 가운데 내 귀를 잡아끈 것이 있었는데 이를 적당히 옮겨보겠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혐오해. 그들은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에 대한 입장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 특히 지식인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의 양심을 채우려고 들지. 나는 그런 사람들의 그 위선을 지극히 위험하게 생각해..."
블로그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에 대한 입장이 다르면 그것은 위선일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나도 물론 부자들이 부럽고, 누구 못지 않게 부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가난한 사람이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사회 정의가 실현되었으면 좋겠다. 이 두 감정이 저 분의 말씀처럼 대립되는 것일까? 아니, 나는 이 두 감정이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싫어해 마지않는, 그래서 덩달아 나도 싫어하는 니체가 떠오른다. 니체는 우주는 위대한 소수의 초인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초인에게 세상의 버러지같은 목숨들은 자양분이 될 뿐이고, 그들에게 동정심 따위를 가지면 안된다고 말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담긴 그의 말을 옮겨보자.
"이 모든 조그마한 민중들 모두가 불행을 다 합쳐도, 한 초인의 느낌 가운데 일어나는 불행을 제외하면, 한 총계를 이루지 못한다."
니체는 참회나 속죄 같은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는 그런 것을 순환적 정신착란이라고 불렀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는 기독교를 싫어했다. 기독교의 사랑은 두려움의 소산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니체는 인간이 보편적인 사랑을 순수하게 느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 남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순수하게 남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위의 아주머니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이기적이지 않은, 타인을 위하는 삶을 위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이타심을 가지기엔 너무도 약한, 사실은 두려움에 쫒겨 부를 좆는 약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진보 경제학자들의 말처럼 분배가 더 나은 성장을 이끌 수 있다고 믿지만, 벤담식 공리주의에 입각해서 진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선의가 진보를 지지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속에는 두 명의 영웅이 있다. 버트런드 러셀과 양 웬리가 그들이다. 한 명은 실존했고, 한 명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는 둘 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환생한다면, 이번 대선에서 나와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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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이런 것도 예가 되나? 공교육 살려야 한다고 정책 이것저것 내놓는데 막상 자식은 해외 유학 가 있는거? 나는 사실 이것도 별 상관 안 하는데 이런 경우 있으면 사람들 많이 열폭하더라.
나는 저 아주머니들이 본인들이 속물인게 속으로는 부끄러워서 괜히 안 그래 보이는 사람들을 안 그런 "척" 한다고 위선이라고 깎아내리는거 같은데. 타인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에이 설마 진짜 그렇게 타인을 위할리가 있겠어? 다 쇼지~" 하면서 괜히 깎아내리면서 스스로 이기적인게 괜찮다고 위안 삼는거지.
Wonyoung Kim/그런 정서인거 같아. 가만보면 철학이라는 것도 어떤 정서나, 소망, 편견 등을 지적으로 확장하고 다져서 이뤄지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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