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8일 금요일
사진이 참 야하다
제목과 글 내용은 별 상관이 없다.. 나도 한 번 가십거리를 가볍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최근에 알게 되어서 열심히 다니고 있는 게시판이 있는데, 몇 주 전에 거기서 가수 나얼의 과거 발언이 다시금 이슈가 되었다. '동성애를 인정하면 근친상간까지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가 그 문제의 발언인데,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더라.
이 발언을 처음 읽으면 어딘가 불편하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느낌을 넘어서, 그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더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이 논리적 주장보다 앞서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문득, 그리스의 옛 철학자들이 주장하던 상기설(想起說)이 떠오른다.
위 발언의 첫 번째 문제점은 애초에 '동성애'와 '근친상간'을 잘못으로 규정하고 논리를 편다는 점이다. 비슷한 다른 문장을 만들어 비교하면 이는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서, '사소한 잘못을 봐주다보면, 큰 잘못도 눈감아줄지도 모른다.'. 아마도 '동성애'의 합법화를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위 발언이 나온 것 같은데, 이를 접한 비기독교인 네티즌 가운데 다수가 '동성애'를 죄가 아니라 유전적 열성(劣性)과 같은 타고난 특성으로 바라보고 있고, 실제로 '동성애'의 합법화에 대한 비기독교인의 강력한 근거가 바로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 발언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두 번째로 위 발언은 '동성애'와 '근친상간'을 가깝게 관련된 요소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이상하다. 역시 비슷한 다른 문장을 만들어보자. '독서를 멀리하다 보면, 공부 자체를 멀리하게 된다.' 라는 문장을 볼 때, 이 문장을 설득력있게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다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이 문장의 설득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독서'와 '공부' 사이의 거리, 즉 '관련성'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와 '근친상간'은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둘다 인류의 태초부터 존재해왔지만, 오늘날 금기시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둘다 금기에 의해서 소외받는 소수자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합법화를 외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공통점은 있을지언정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기 힘들어서, '동성애'를 인정한다고 '근친상간'도 인정하게 될거라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으로 보인다.
'동성애'에 대한 오늘날의 시선이 많이 관대해진 이유는, 동성애자들의 적극적인 홍보도 큰 역할을 했지만, 뇌과학적인 연구결과도 한몫을 했다. 동성애자의 뇌가 이성애자랑 다르다는 사실은, 이들을 우연이 낳은 피해자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최근에는 범죄자의 뇌구조에 대한 연구도 풍부하게 진행되고 있고, 이러한 연구들은 이중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들을 우연이 낳은 피해자로 만들어 주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을 교화될 수 없는 타고난 범죄자로 낙인찍고 있는 것이다.
'죄'라는 개념보다 더 큰 '인간애'의 개념으로 동성애자도, 범죄자도 바라보는 사회를 바란다.
어쨌든 나얼은 노래를 참 잘하는 것 같다.
p.s: 조회수로 봤을 때 드문 가능성이지만, 혹시나 동성애자 분이 내 글을 볼 가능성을 고려하여 몇몇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명확히 하려고 한다. 생물학 지식이 있는 이들은 알겠지만 유전적 열성은 '모자람'이나 '부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금발머리는 유전적으로 열성이지만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매력포인트이다) 또한 우연이 낳은 피해자란 소수자라는 의미이지,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혹시라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2012년 9월 26일 수요일
이데아와 지성의 힘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을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을 때, 그림과 음악이란 형식을 뛰어넘어, 그 안에 내포된 아름다움이라는 공통의 무언가를 포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켜서 이데아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실재(reality)와 현상(appearance)을 구별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현상을 감각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감각기관에 포착되는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사물은 모순되는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지 못하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 그 자체(beauty itself)가 될 수 없다. 반면에, 그 개개의 사물을 통해 포착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으면, 우리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idea)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개개의 그림과 음악은 이 이데아의 일부에 참여함으로서 아름다운 느낌을 줄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현상을 넘어 실재를 포착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철학을 함으로서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바라보는 세상에서 만물은 동등하지 않고, 더 위대한 것, 더 실재에 가까운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더 높은 수준의 지성에 도달해야만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사상과 기독교의 간극이 발생한다. 기독교는 누구나 신심(信心)을 가지면 덕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하지만, 플라톤에게는 지성이 덕을 갖추는 필요조건이 된다. 관련된 과거 포스팅을 링크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철학자는 감각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만인을 구원하는 특별한 인물이며, 여기서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나오게 된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동굴 속에 갇힌 죄수와 같다. 그는 빛을 등지고 있고 동굴 밖을 바라볼 수 없다. 죄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자신과 사물의 그림자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림자를 실재(reality)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철학자는 동굴에서 탈출한 자이며, 그는 자기가 지금껏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철학자는 동굴로 돌아가 죄수가 동굴을 탈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려 한다. 하지만 죄수를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빛 속에 있다가 다시 어두운 동굴에 들어갔기에 죄수보다 동굴 안을 잘 바라보지 못할 것이고, 죄수는 그러한 철학자를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이데아의 사상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1) 우선 현상(appearance)의 그림은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지 않는다 라는 문장을 분석해보면, 사실은 그림의 어떤 부분은 아름답고, 그와는 '다른' 어떤 부분은 아름답지 않다고 구분할 수 있으므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림과 음악을 통해 접하는 아름다움에 어떤 유사한 느낌이 있는 것은, 인간이 감각을 받아들이고 뇌가 반응하는 과정을 고려해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이데아의 존재를 근거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2) 이데아는 보편개념에 대한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문장에서 소크라테스는 고유명사로서 특수개념이라 할 수 있고, 인간은 보편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개념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확장해준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보편개념이 존재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데아가 필요하다는 것은 보편개념을 또다른 특수개념으로 혼동한 것이다.
3) 이데아를 비판한 유명한 '제3인간 논증'이 있다. 어떤 인간이 인간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간과 인간의 이데아 둘 다를 포함하는 제3의 이데아가 존재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반복될 수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이데아의 연속이 발생한다.
2.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만인이 동등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노예 제도가 보편적이었던 그리스 시대에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귀족층만이 지혜를 쌓아갈 수 있었고, 보다 높은 지성을 갖춘 철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데아의 존재를 부정하더라도, 덕을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이러한 견해마저 부정하기는 힘들어보인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누구나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선택된 소수에 의한 통치라는 결론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버트런드 러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를 비판한다.
1) 실제 세상은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엇갈려있고, 갈등은 무지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타협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더 뛰어난 소수를 구별해낼 방법이 존재하는가? 혈통만으로 귀족이나 왕이 통치를 하는 것은 말이 안되고, 어떤 방면의 전문가조차 때로는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러셀에게 있어서 결국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 통치를 맡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최종근거가 된다.
하지만 1)의 이해관계의 타협이라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지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올해 대선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기업과 노조, 성장과 복지도 계급갈등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지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지성이 신자유주의를 선택했던 과거에는 기업과 성장의 가치가 승리했고,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환상을 새로운 지성이 무너뜨리고, 노조와 복지의 가치가 다시금 힘을 얻고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지성의 힘을 믿는다.
플라톤은 실재(reality)와 현상(appearance)을 구별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현상을 감각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감각기관에 포착되는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사물은 모순되는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지 못하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 그 자체(beauty itself)가 될 수 없다. 반면에, 그 개개의 사물을 통해 포착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으면, 우리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idea)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개개의 그림과 음악은 이 이데아의 일부에 참여함으로서 아름다운 느낌을 줄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현상을 넘어 실재를 포착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철학을 함으로서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바라보는 세상에서 만물은 동등하지 않고, 더 위대한 것, 더 실재에 가까운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더 높은 수준의 지성에 도달해야만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사상과 기독교의 간극이 발생한다. 기독교는 누구나 신심(信心)을 가지면 덕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하지만, 플라톤에게는 지성이 덕을 갖추는 필요조건이 된다. 관련된 과거 포스팅을 링크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철학자는 감각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만인을 구원하는 특별한 인물이며, 여기서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나오게 된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동굴 속에 갇힌 죄수와 같다. 그는 빛을 등지고 있고 동굴 밖을 바라볼 수 없다. 죄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자신과 사물의 그림자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림자를 실재(reality)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철학자는 동굴에서 탈출한 자이며, 그는 자기가 지금껏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철학자는 동굴로 돌아가 죄수가 동굴을 탈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려 한다. 하지만 죄수를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빛 속에 있다가 다시 어두운 동굴에 들어갔기에 죄수보다 동굴 안을 잘 바라보지 못할 것이고, 죄수는 그러한 철학자를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이데아의 사상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1) 우선 현상(appearance)의 그림은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지 않는다 라는 문장을 분석해보면, 사실은 그림의 어떤 부분은 아름답고, 그와는 '다른' 어떤 부분은 아름답지 않다고 구분할 수 있으므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림과 음악을 통해 접하는 아름다움에 어떤 유사한 느낌이 있는 것은, 인간이 감각을 받아들이고 뇌가 반응하는 과정을 고려해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이데아의 존재를 근거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2) 이데아는 보편개념에 대한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문장에서 소크라테스는 고유명사로서 특수개념이라 할 수 있고, 인간은 보편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개념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확장해준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보편개념이 존재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데아가 필요하다는 것은 보편개념을 또다른 특수개념으로 혼동한 것이다.
3) 이데아를 비판한 유명한 '제3인간 논증'이 있다. 어떤 인간이 인간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간과 인간의 이데아 둘 다를 포함하는 제3의 이데아가 존재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반복될 수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이데아의 연속이 발생한다.
2.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만인이 동등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노예 제도가 보편적이었던 그리스 시대에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귀족층만이 지혜를 쌓아갈 수 있었고, 보다 높은 지성을 갖춘 철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데아의 존재를 부정하더라도, 덕을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이러한 견해마저 부정하기는 힘들어보인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누구나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선택된 소수에 의한 통치라는 결론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버트런드 러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를 비판한다.
1) 실제 세상은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엇갈려있고, 갈등은 무지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타협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더 뛰어난 소수를 구별해낼 방법이 존재하는가? 혈통만으로 귀족이나 왕이 통치를 하는 것은 말이 안되고, 어떤 방면의 전문가조차 때로는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러셀에게 있어서 결국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 통치를 맡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최종근거가 된다.
하지만 1)의 이해관계의 타협이라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지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올해 대선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기업과 노조, 성장과 복지도 계급갈등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지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지성이 신자유주의를 선택했던 과거에는 기업과 성장의 가치가 승리했고,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환상을 새로운 지성이 무너뜨리고, 노조와 복지의 가치가 다시금 힘을 얻고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지성의 힘을 믿는다.
2012년 9월 21일 금요일
미국에서 일어난 경제 이슈
미국 Fed가 3차 양적완화를 결정했다. 그 내용은 크게 3가지.
1. 매달 400억 달러의 MBS를 무기한 매입
2. 0~0.25%의 초저금리를 최소 2015년 중반까지 연장.
3. 오퍼레이션트위스트의 지속.
시장의 예상을 넘어서는 과감한 조치였다. 비슷한 시기에 ECB도 무제한 국채매입의 의지를 보였고, 독일 헌법재판소에서 ESM에 대한 조건부 합헌을 결정했다. 한편으로 국제적인 공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과 미국의 큰 차이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상 다른 국가의 연합인 유로존에서는 이제야 비전통적 조치가 시도되고, 유로안정화기구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보게 된다.
미국은 4분기 고용지표가 늘 개선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 늦으면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양적완화 이후 시장에 효과가 나타나는데 대략 6개월의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지금이 시기적으로 이상적이었다는 평. 또한 개인적으로는 Obama 대통령을 지원하는 Bernanke의 입장도 고려되었으리라 추측한다.
이번 조치에서 중요한 대목은 앞으로의 정책 방향에 대한 Bernanke의 발언이다.
"To support continued progress toward maximum employment and price stability, the Committee expects that a highly accommodative stance of monetary policy will remain appropriate for a considerable time after the economic recovery strengthens."
Krugman은 목표하는 인플레이션 수치, 명목 GDP나 실업률 지표 등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considerable time after the economic recovery strengthens."라고만 말하는 모호함은 반대파들에게 소지를 제공할 수 있다며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Financial Times에 실린 바가 있듯이, QE3 이후에 BER 등에 상승의 움직임이 있고, 이러한 기대 인플레이션 효과는 지난 QE1,2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이에 대하여 Krugman은 기대 인플레이션이야말로 QE3의 목적이라며 이를 옹호하고 있다.
몇몇 기사를 보면 MBS 금리와 실제 주택대출금리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며 QE3의 실효성을 의심하는데, 솔직히 저런 움직임은 양적완화 초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책의 성패는 이렇게 단기간에 평가할 수 있는게 아니지.
이번 QE3 조치는 이전의 양적완화와는 달리, 주택시장에 집중되어 있고, 지금의 주가도, 주택 경기도 이전에 비하여 양호하다. IT 시장이 빠르게 변화하여 불과 몇년 전 핸드폰을 싸구려로 만들어버리는 것과는 달리, 주택이라는 자산은 아주 고가이면서, 그 생명력이 길고, 삶에 직접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택의 구입은 시중 금리와 연관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전히 미국 주택시장은 위축되어 있지만, 바닥을 다지고 회복되는 국면에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QE3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문제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각종 부작용이다. 미국의 경기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주식시장에서도, 상품시장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QE3는 이 모든 가격을 부풀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Marc Faber 등의 비관론자들은 양적완화가 유발하는 인플레이션이 양극화를 더욱 심화할 것이라며 비판한다. 가능한 일이다. 특히 석유와 같이 경기와 깊은 상관관계를 지닌 상품 가격의 폭등은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어쨌든 미국, 유럽에서 화폐가 풀리고 있고, 엔고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도 곧 양적완화를 시행한다고 한다. 그리고 9월 한국은행은 예상을 뒤엎고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4분기와 내년에 시장 상황에 따라 추가 인하를 감행할 여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이미 시장금리가 기준금리보다 더 낮은 현 상황은 국제적인 금리기조에 민감한 우리나라의 특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은이 그만큼 시장에서 주도권을 잃었음을 반영하기도 한다. 작년 4분기 중국이 물가압력을 줄이고자 금리를 인상할 때, 금리를 동결했던 후폭풍을 맞고 있다는 몇몇 분석이 설득력있게 느껴진다.
2012년 9월 10일 월요일
애니웨이 굿나잇
1. 지난 주에 공중보건의 체육대회가 있었다. 경기도 농구팀 대표로 출전했는데, 농구 인생에서 처음으로 혼자서 모두를 이끌어야 했다. 개인적으로 큰 경험이 되었고, 팀원들과 소중한 추억을 쌓았다. 체육대회 우승 따위는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있는 기분을 느낀다.
2-1. 한 후배가 인상깊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족이 겪은 황당한 범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알고보니 범인들이 고아원 출신의 불우한 아이들이었다. 범인들의 정체를 듣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 사회의 피해자들이네."이었고, 다른 후배는 "원래 나쁜 아이들일 거에요."라고 답했다.
2-2. 범죄 성향이 타고나는 것인가 환경탓인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고 있고, 연구되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최근의 연구결과들은 점점 유전적 요소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 아이들이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도 저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보다 우아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살았을거다. 여전히 범죄를 저지른다면 아마도 횡령이나 배임 정도를 하지 않았을까? 범죄에도 계급이 있다는 말은 참말이다.
3. 엊그제는 그 유명한 파워블로거의 역학연구소를 방문했다. 나는 소의 관상에, 이재(理財)에 밝고, 사회성과 정치성이 좋으며, 사람보는 눈이 아주 정확하다고 한다. 치과의사는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고, 몸에 금(金)이 많으니 헬스는 그다지 좋지 않다. 연애를 잘 못한다니까 웃기지 말라고 하더라. 음. 헬스를 계속 하고 싶다는 점만 빼면 대충 수긍은 간다. 아, 나보고 정치인을 하라던데, 그건 정말 싫다고.
4. 대전의 모교에 잠시 들렀는데, 우연히 그날 밤 재미있는 록 페스티발이 개최되고 있었다. 서남표 총장의 퇴진을 위하여 개최되는 공연이라고 하니 재미있고, 무엇보다 공연의 제목이 '애니웨이 굿나잇 클럽'인데 이에 얽힌 사연이 아주 귀엽다.
과거 서남표 총장이 학생들과의 대담에 참가하겠다고 말하고는, 당일에 취소하고 대담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 총장이 보낸 참가 취소 메일의 마지막 인사말이 바로 '애니웨이 굿나잇'이었다고.
나는 러플린 시절에 졸업을 했기 때문에 서남표 총장의 개혁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고, 친구들과 각종 사회인사들의 의견들도 제각기 다르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논의와 무관하게, 저 록 페스티발은 (죽이는 제목과 더불어서) 권위에 저항하는 정신이 담겨있는,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다. 내가 나의 모교를, 그곳의 찌질한 공부벌레들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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