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7일 화요일

기독교와 종교

1. 나의 아버지는 무교,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이시다. 덕분에 나는 어릴 적에 꾸준히 성당을 다녔고, 심지어 세례도 받았다. 신부님, 수녀님들 모두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어머니가 쓰시는 하얀 면사포도 좋았다.
 내가 더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된 것은 정서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과학자로 키우고 싶어하셨다. 매달 우리집에는 과학잡지가 배달되었고, 자연과 우주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면 온가족이 모여 시청하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의 책을 아버지를 졸라서 구입하고는,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읽었다.
 이들 과학 저서에 담긴 이야기와 성당에서 배우는 성경의 내용은 너무도 달랐다.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잔인해보였고, 이스라엘인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집에서 가장 현명하신 아버지가 지옥에 가야만 하다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연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믿지 않게 되었고,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나는 믿지 않는다.'라며 공언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의 핵심, 즉 '신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한 나의 생각은 큰 줄기에 있어서 버트런드 러셀과 일치한다. 나 역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기독교인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도입한 제1원인론의 논리를 거부한다.

 제1원인론은 '모든 존재자(存在者)는 그 원인이 있다.'라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나는 부모님의 존재 덕분에 태어났고, 이러한 논의를 반복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에는 궁극의 제1원인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위 논리는 아주 쉽게 논파할 수 있다.
1) 모든 존재자에 원인이 존재한다면, 하나님도 그 원인이 존재해야만 한다.(하나님의 하나님이 필요하다)
2) 모든 존재자에 원인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면, 하나님이라는 제1원인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위의 1),2)의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이란 존재를 가정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은 존재할 수도 있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불가지론이 결론으로 유추될 수 밖에 없다.

 위 책의 '13.하나님은 존재하는가' 편에는 러셀과 코플스턴 예수회 신부가 TV공개토론을 하면서 주고받은 논쟁이 실려 있다. 이들은 제1원인론을 두고 설전하는데 형이상학적인 표현이 낯설을 뿐, 본질적인 내용은 위 논의와 다를 바가 없다.

 재미있는 점은, '모든 존재자는 그 원인이 있다.'라는 명제 자체가 이미 데이비드 흄 이후로 믿을만 하지 않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주장으로 판명되었다는 거다. 흄은 인과관계와 귀납법은 순환 논증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으므로(=증명될 수 없으므로), 인과관계와 귀납법으로 새로운 진리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종교 뿐만 아니라, (내가 보다 신뢰하는) 과학에게도 치명상을 입힌다.
 버트런드 러셀은 (내 생각엔) 아마도 과학은 기존의 자연법칙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심하는 회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종교는 거의 의심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실 제1원인론이 입증되었다 한들, 기독교가 진리임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방대하고 신비로운 우주에 비하여 믿을 수 없을만큼 작고 보잘 것없는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인간과 꼭 닮은, 인간에게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주고, 인간의 윤리관을 보유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외계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 망상적인 것이다.


2.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주류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행태에 문제가 많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점을 차치하더라도, 세금만이라도 제대로 내면서 나쁜 짓을 했으면 좋겠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926090704579&p=sisain

 이에 대해서는 위 기사가 내 눈에는 너무나 완벽해 보여서 뭐라 더 덧붙일 말이 없다. 정말 좋은 기사.

'교회 면세'는 정교분리 원칙의 준수, 그리고 이로 인해 재산상 피해가 불가피한 일반 납세자들을 설득할 정도의 공공성을 교회가 보장할 때 사회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에서만 관행적으로 시행되는 '종교인 면세'에는 어떤 사회적 정당성도 없다. 보수 개신교계 목회자들이 정당을 만들어 시민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이는 해당 목회자들이 개인 소득세를 기꺼이 납부하고 소속 교회의 면세 특권을 포기할 때 진정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양'의 '무상'을 그토록 혐오하면서, '목자'만 '무상'을 누리겠다면 누가 '기독교 정당'을 기꺼워하랴.

2011년 12월 23일 금요일

유럽위기와 ECB

 이틀전 ECB가 3년 만기 대출 4890억 유로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시장 예상치는 약 3000억 유로 정도였고, 이를 훨씬 상회하는 유동성 공급에 시장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어제 이탈리아 2년 만기 국채 금리가 드라마틱하게 떨어졌다. 허나, 이번 조치 역시 시장 경색을 풀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 여전히 유로존 국가들의 채권 금리는 상당한 수준이며, 독일의 break-even rate도 1.2%에 불과하다.

1. 유럽에 위기가 찾아온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는 외인/내인의 두 가지 입장이 있을 것이다. 1) 첫 번째 입장은 위기의 발발은 유럽 '밖'에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미국의 금융위기가 그것. 이 입장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 경제를 위축시켰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재정 적자가 심각한 수준까지 악화된 것이 위기를 낳았다고 말한다. 2) 두 번째 입장은 유럽이 내재된 악성을 키워왔으며, 미국발 금융위기는 단지 기폭제에 불과함을 말한다.
 나는 두 번째 입장에 찬성한다.
 결정적 근거로, 스페인의 GDP 대비 국가 부채 규모는 2007년 경 40% 미만으로서 매우 건전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보다 높았으나, 2007년 이전에 비해 부채 규모가 축소되고 있었다. 유로존 위기가 그리스에서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확장된 것은 국가 부채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의 (유로존 전체에 비하여) 아주 작은 경제 규모와 위의 사항을 함께 고려했을 때, 국가 부채는 유럽의 위기를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유럽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이상이 경제적인 현실을 담보하지 못한 데에 의한 것이다. 유럽과 미국을 대비하면 이는 명확해진다.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섬과 같다. 수십개 주의 사람들은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국민을 정체성으로 가진다. 이에 비하여 각기 다른 언어, 국가, 정체성을 가진 유럽은 통합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국가는 위기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를 두 개 가지고 있다. 바로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이 그것인데, 유로존의 개별 국가들은 통화 정책이라는 무기를 잃어버렸다. 국가간 노동시장의 경직성 또한 위기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몇몇 국가들의 심각한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국가, 정체성의 차이가 노동력의 이동을 가로막는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유럽의 통합에 있어서 경제적인 고려가 심각하게 결핍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 물가안정만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는 ECB의 전통은 미국의 FRB와 분명히 다르지만, (아마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사견을 말하자면, 유로존은 미국에 비하여 세계 경제에서 가지는 위상에도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역내 무역이 GDP의 상당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가진다. 인플레이션 압력을 외부로 전가하는 미국에 비하여, ECB가 연준보다 인플레이션에 민감함을 다소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가령, 핵심물가 지표를 중시하는 연준에 비해 ECB는 소비자물가 지표를 중요하게 고려한다. 또한 정치적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독일이 ECB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도 유관하다.

 허나, 이러한 모든 점을 차치하더라도 ECB와 독일의 지난 행보가 위기 진화를 어렵게 만들어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유로존의 단일 통화 정책에 의해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국가는 독일과 같은 유로존 내 수출국들이다. 유로존 출범 이후, 유로존 내 수입국의 통화 가치는 상대적으로 절상되었고 유로존 내 수출국의 통화 가치는 상대적으로 절하되었다. 자연스럽게 역내 무역은 수입국의 무역 적자와, 수출국의 무역 흑자를 심화시켰다. 이는 Paul Krugman의 블로그에 과거 posting된 'Mysterious Europe'의 current account balances 그래프에 잘 드러나 있다.

http://krugman.blogs.nytimes.com/2011/11/26/mysterious-europe/

 이와 같은 역내 무역 불균형의 결과, 수출국의 자본이 대량으로 수입국에 유입되었고 자산 거품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수입국의 사치와 방탕이 위기를 낳았다는 보수적인 관점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독일과 ECB의 입장이 보다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ECB의 이번 조치는 분명한 호재이다. 그러나 규모의 부족함 뿐만 아니라, 은행을 경유한 자금 대출이라는 점 때문에 실제 채권 금리 인하를 얼마나 이끌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비관적 시선도 많다.
 많은 이들이 내년 1분기가 유로존 위기의 turning point가 되리라 예측하고 있다. Nouriel Roubini는 결국 몇몇 국가들이 유로존을 탈퇴할(해야만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냉철한 해법인 것 같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Sims, Sargent는 과거 미국의 통합과정에 비유하여 유로존 위기의 해법을 제시한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1&no=658536

 오늘은 ECB 이사가 드디어 양적완화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건 정말 놀랄만한 변화다. 앞으로 유로존의 위기가 어떻게 진행될까?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122359071

p.s : 2012.8.31 지난 글을 다시 보니 논리가 조금 성글어보여 약간 수정한다.

2011년 12월 18일 일요일

세상의 일

1. 기분이 좋지 않다. 저녁에는 많이 우울해서 친한 형을 불러서 같이 아이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았다. Mission Impossible 4는 쉬지않고 볼거리가 제공되는 좋은 헐리우드 영화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BMW 슈퍼카는 굉장했다!

2. 주말 동안 학원에서 특강을 했다. 어제는 친핵성 반응, 오늘은 이성질체. 어제 강의는 이전에 정성껏 준비한 적이 있던 내용이라 수월했다. 적당한 긴장도 하고 있었고 남부끄럽지 않게 가르쳤다. 하지만 오늘의 강의는 엉망이었다. 나태한 정신상태로 성의없이 준비를 하고도, 강의가 끝날 때까지 잘못하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했다. 내 강의가 좋았는가 나빴는가는 수업을 마친 뒤 학생들의 표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제 학생들은 기뻐하고 있었고, 오늘 학생들은 실망하고 있었다.
 처음 경험하는 일도 아니었다. 매주의 첫 번째 강의보다, 두 번째 강의가 엉망이 되곤 했다. 긴장감을 유지하고 철저히 준비하자 다짐했었다.
 이미 충분히 경험했고,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을 또다시 망쳤다.

3. 어제 밤에는 청담에서 아는 동생이 주최한 파티에 친구들과 놀러갔다. 미국인과 유학생이 아주 많았다. 이런 세계에서는 학벌은 떠벌일수록, 돈은 많이 쓸수록, 옷은 비쌀수록, 술은 잘 마실수록 빛이 나는 법이다. 솔직히 나와 맞지 않는 곳이다.

4. 금주에는 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하는 동기들의 결과가 들려왔다. 올해도 많은 비극이 일어났다. 세상 일이란게 마음먹은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적어도 병원 일은 썩은 병원 시스템과 교수들을 욕하면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비극이 생기기도 한다. 그것도 아주 빈번히. 그게 세상의 일이다.

2011년 12월 9일 금요일

잡담

1.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 가운데 '그 시절과 지금', '버핏세 2'를 일부 수정하고 내용을 추가했다. 소통을 원하는 블로그 답지않게 불충분한 설명, 불충분한 근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 쓴 글이라고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무리하지 않되, 의미있는 포스팅이라.. 내 부족한 전문성이 문제다.
 아무튼 다른 이들이 찾아올 '만한' 블로그를 만든다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더 길고, 상세하고, 유려한 포스팅을 하는 블로거들은 참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유럽 위기, 우리나라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포스팅을 하고 싶다. 유럽 위기는 사실 꽤나 생각과 근거가 정리되어서, 추스려서 녹여내면 되는데 귀찮은게 문제다.

2. 정치판이 어수선하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대충은 그려지지만 깊이 고찰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나는 내가 학창시절 수많은 진로 가운데 '공부'를 택했다는 게 무척 만족스럽지만, 막상 직업을 '공부'로 택하지 못한 것은 이따금 아쉽다. 어쨌든 혹시 미래에 기회가 있더라도, 절대로 정계에 나가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3. 12.7 부동산 대책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미 유예되어 있던 양도세를 폐지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약효가 있겠으나, 장기적 경제 건강은 악화될 수 있다. 꺼내들 카드를 모조리 내보일만큼 부동산 시장의 하드랜딩에 대한 압박이 심한 것일까? 진심으로 전세값 안정이 지금 필요한 서민 안정 대책이라고 생각하는걸까? 지금 서민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집값은 떨어지지 않을 것, 그리고 남의 집값은 떨어질 것 그 뿐이다. 전세값은 본질이 아니다.

게임의 법칙

 얼마전 아는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교정을 받고 싶은데 물어볼게 있다며 급속 교정이랑 보통 교정이랑 어느게 더 좋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급속 교정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이내 라미네이트 시술을 의미하는 것임을 기억해냈다. 치과 술식 가운데 학술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이 개원가에서 다르게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도 같은 경우이다.

 치의학은 분명 나름의 이론적인 논리체계를 구축하고, 실제 적용된 결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학문이다. 허나 치과의사가 실천해야 하는 진료의 영역은 치의학과 다른 일종의 간극, 사각지대를 포함하고 있다. 이에는 두 가지 변수가 영향을 미치는데, 하나는 환자의 사회적 위치, 가치관, 요구와 같은 전인격적 요소, 다른 하나는 진료의의 경제적 동기이다. 이 둘은 치의학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다.

 치의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라미네이트 술식은 꽤 명확하다. 이는 유지가 좋지못한 수복 방법이다. 그러나 대신 치질삭제가 적고, 간편하며, 심미적이다. 치의학은 '치료'라는 목적을 근거로 유지의 불충분함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그러므로 이 술식은 제한적으로 권해진다. 허나 개원가에서 실제로 이 술식은 널리 행해지고 있다. '미용'이라는 목적과 '이윤'이라는 목적에서 이의 장점이 중요하게 고려된 탓이다.
 어떤 환자에게 라미네이트 술식을 하는 것이 좋을까. 치의학적 명확함과는 달리, 진료의 영역에서 이는 불명확해진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환자의 직업, 가치관, 요구가 영향을 미치고, 진료의의 경제적 동기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일종의 거래로 보고, 그 경제학적 함의를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치과의사와 환자는 서로 입장이 다를 뿐 아니라, 철저히 비대칭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 치과의사가 환자에게 '레몬'을 고르게 만들기는 너무나 쉽다.
 진료 술식의 결정에 경제적 동기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상당부분 다른 개원의와의 경쟁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곧 경쟁에 참여하겠지. 개원가의 치과의사들 모두 게임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 있다. 두 죄수 모두 범죄를 부인하면 둘다 풀려날 수 있지만 서로를 신뢰할 수 없기에 결국 둘다 범행을 자백하게 된다는 경제이론이다. 개인의 인센티브로 짜여진 경쟁구도가 가져올 수 있는 파괴적인 결과. 작금의 치과계랑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2011년 12월 5일 월요일

버핏세 2

 세제 개편에 관한 좋은 기사.

http://media.daum.net/economic/cluster_list.html?clusterid=468634&newsid=20111205180526746&clusternewsid=20111205180526746

 과거 블로그에서 '버핏세' 논의가 국내에 일어나는 것을 적극 찬성하는 입장을 적은 기억이 있다. 논의는 이제 시작이고, 과정을 자세히 지켜봐야겠지만 세제 개편이라는게 알면 알수록 만만한 일이 아니다.

 위 기사는 소득세 최고구간 신설이라는 논리가 가진 맹점을 짚는다.
"이는 '부자가 늘었으니 세율을 높이자'는 논거로도 이용된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나라는 더 많은 고소득층이 최고세율을 부담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허나, '미국의 버핏세'가 의미하는 바는 고소득자의 세율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일부 기사에서 다루듯 자본이득세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본질적으로는 바로 '슈퍼부자 증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금은 수요-공급 곡선의 적정 가격을 왜곡하고 후생을 줄인다. 허나 '슈퍼부자'의 잉여 자본은 어떻게 봐야만 할 것인가. 증세가 근로 의욕을 떨어뜨린다? 이들의 수입에서 위 논리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의 막대한 저축이 적절한 투자로 전환되어 사회의 부(富)에 올바른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나의 생각은 Paul Krugman이 최근 포스팅한 칼럼과 같다. 제목은 "We are the 99.9%".

http://www.nytimes.com/2011/11/25/opinion/we-are-the-99-9.html?_r=1&ref=paulkrugman

  Krugman은 super-elite들이 정말 막대한 연봉에 걸맞는 job creator, innovator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던진다. 그들은 그저 기업의 bigwigs, 금융시장의 wheeler-dealers가 아닌가. 유사한 논리를 우리 사회에도 던질 수 있을거다. 물론 우리의 '슈퍼부자'는 미국의 그것과 성격이 다르므로 우리에게 맞는 논의가 새로이 필요하겠지.
  '슈퍼부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여 세수 증대 효과가 미미하므로 최고구간 신설은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라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공제 정책도 그 세수 효과는 미미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정책들이 어우러져 나타나는 시너지를 기대해야만 옳을 것이라고 반박하겠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슈퍼부자 증세'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게 지금 시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또한 1억 5천만~2억 정도로 제시되고 있는 최고구간 개설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우리나라의 세율은 OECD 전체와 비교해서 결코 낮지 않다. 그런데 과연 저 구간이 '슈퍼부자'를 의미하는가? 제시되는 최고구간의 연봉은 미국에서 이야기되는 100만달러와 GDP를 고려해서 단순 비교해도 2-3배나 적다. 더 높은 최고구간을 설정해도 최고구간 신설이 조세정책적 의미가 있을까? 나는 오히려 GDP, 물가상승률과 연동되는 소득세 구간의 설정, 자본이득세의 검토 등 합리적인 세제 개편으로 논의가 전개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현 조세 제도의 손질이 먼저라는 거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는 소득세 구간이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나라 경제를 끊임없이 성장하고, 물가상승률도 매년 달라진다. 많은 해외 선진국들은 소득세 구간을 인플레이션, GDP성장률과 연동하고 있다. 이것이 더 이치에 맞지 않을까?
 또, 우리나라에서 올해 공제되는 세금액이 3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최고구간을 1억 5천만~2억으로 신설했을 때 걷힐 수 있다고 주장되는 1조원의 30배에 달한다. 이 중 불필요하거나 불합리한 공제 제도는 없을까?

 이론적으로 올바른 세수 확충은 '보다 넓은 과세표준, 보다 낮은 세율'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 기사에서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듯이 1) 지하 경제, 탈세를 줄이는 것 2) 합리적 공제 제도 정비 3) 소득세 구간과 GDP성장률, 물가상승률의 연동 4) 자본이득세 정비 등으로 논의가 확대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소득세 구간 문제가 보다 대중적인 소재로서 정책적인 힘을 얻고 있으나, 위 4부문이 오히려 더욱 심도있게 논의되고, 공론화되었으면 좋겠다. 이것들이 최고구간 신설보다 훨씬 중요하다.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서울에서

1. 한 주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배가 출항을 쉬었기 때문인데, 주로 카페에 머무르며 책을 읽었다. 쇼핑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하루는 어머니를 모시고 멕시칸 음식을 먹기도 했다. 좋아하는 가게인데 그 날 그 동네에서 먹은 요리는 안타깝게도 여태껏 먹어본 최악의 수준이었다.
 책을 열정적으로 읽기도 했지만, 한편 많이 허무하고 외롭기도 했다. 블로그를 하기로 해서 다행이다. 연말에는 올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다지 많지는 않다. 같은 책을 여러번 읽는 습관때문에..

2. 공무원 복지포인트 덕분에 책도 세 권 주문하고, 마음에 드는 구두와 신발, 패딩자켓을 구입했다. 어제 처음 입은 와인색 패딩자켓이 무척 마음에 든다. 공짜라서 더 좋아. 올해 센스있는 여자친구 덕에 쇼핑 많이 배웠다. 촌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있어.

3. 온라인으로 과외하는 녀석은 미국에서 pre-medi를 전공하고 있는데, 당돌하기도 하고 재밌는 녀석이다. 어제는 분광학을 하는데 옛 기억만으로 가르치려니 많이 헤맸다. 그래도 대학생 가르치는 과외선생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성적도 내 덕에 많이 올라서 잘릴 걱정은 안해도 된다.
 과외하다가 여자친구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대뜸 '여자친구 골치아프죠.'라는 리액션이 나왔다. 전에 여자친구 한 명 사귀었었고, 지금은 중국인 여자친구가 있다더라. 중국 여자가 그렇게 기가 세다면서 자꾸 자기가 엄청 예쁘다고 한댄다;; 마지막엔 한숨을 포옥 쉬며 '여자친구보단 이제 공부를 해야죠.'이런다. 요 녀석 한국 나이로 20살이라는데 그래도 성인이라고 가르칠 때 존칭을 써주고 있다. 가끔 후회될 때가 있다.

2011년 12월 2일 금요일

그 시절과 지금

 러셀의 저작은 이제 그만 읽을 생각이긴 했으나,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해서 오랫만에 '결혼과 성'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자제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며, 또 우리의 제도와 도덕적 관습이 자제의 필요성을 최대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최소화하기를 바란다. 자제의 효용은 기차가 달린 제동장치의 효용과 흡사하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유용하지만, 방향이 옳을 때에는 유해할 뿐이다."

 러셀은 과거 원시시대부터 농업사회, 중세를 거쳐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결혼제도와 성 의식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고찰한다. 특히 기독교가 결혼관과 성의식에 미친 역할을 비판하고, 보수적 성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촉구한다. 구체적으로 혼전 성교는 물론이고, 혼전 동거, 더 나아가서 우애 결혼(compassionate marriage)까지 허용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러셀의 책을 읽을 때는 시대적 특성과 러셀의 성장배경을 고려해야만 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말기에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도덕적 인습(특히 기독교의 그것)이 유년기에 미치는 폐해를 경계했다. 그는 그 시대 지성인의 대부분이 그러했듯 과학의 힘에 다소 경도되어 있었고, 심리학과 유전학의 발전을 지나치게 확신했다. 파시즘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네셔널리즘의 힘을 과대평가한 반면, 자본주의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충분히 예상하지는 못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국가가 어버이의 자녀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과 일부일처제 가정의 형성을 러셀이 예상한만큼 약화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는 분명히 경제활동의 최소단위로서 개인이 강화되고, 국가의 역할은 '작은 정부'라는 모토아래 개인의 보조에 그쳤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과 여의 역할문제는 여전히 과도기적 상태로 생각된다. 페미니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견해가 관습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주의는 구시대적 유물이 되고 있지만 이는 냉전의 종식과 세계화라는 경제적 효과에 의한 것일 뿐, (러셀이 바랐던)국제정부의 탄생 때문은 아니다. 남녀관계는 지난 1세기 동안 많이 개방되었다. 산아제한 허용, 피임법의 보급, 이혼의 확대도 전세계적으로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룩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일처제 가정이 지속되는 한, 간통문제는 (비록 약화되었을지라도)여전히 결혼생활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사랑과 질투를 둘다 본능으로 규정하고, 사랑을 확대하고 질투를 축소하라는 러셀의 견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큰 설득력을 가지는 것 같다.

 솔직히 처음 읽은 책도 아니고, 나로선 지성의 훈련이라는 측면을 제외하면 이 책은 더이상 유익하지 못하다. 금새 읽기는 했다만..
 자, 이제 촘스키의 책을 읽을 차례다. 근데 이거 제목이 '촘스키, 러셀을 말하다.'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