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7일 월요일
책 쇼핑도 중독된다
다른 쇼핑과 마찬가지로 책을 구입하는 행위도 중독이 되는 것 같다. 이전에 구입했던 책들을 2/3쯤 읽고나니 다른 책들을 더 읽고 싶어졌다. 결국 5권의 책을 샀는데, 당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교양도서에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 셈이다. 에라이. 잘 하는 짓인지.
종교와 과학/버트런드 러셀 저/김이선 역/동녘
과학의 미래/버트런드 러셀 저/석기용 역/열린책들
인기없는 에세이/버트런드 러셀 저/장성주 역/함께읽는책
런던통신 1931-1935/버트런드 러셀 저/송은경 역/사회평론
아들을 공부하라/데이비드 토마스, 스티븐 제임스 저/김양미 역/글담출판사
1. '아들을 공부하라'는 Hubris님의 추천을 읽고 구입하였는데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는 부담없는 책이었지만, 솔직히 기대이하였다. 전반부는 흥미롭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진부한 인상. 무엇보다 아들이 성년이 되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내용은 어이가 없었다. 종교적인 내용을 싣고 싶다면 종교 전문 서적으로 싣거나, 처음에 표지에 밝혔으면. 이는 나같은 무신론자에게는 폭력이다.
생각해보니 Hubris님의 추천 서적들이 내 마음에 들은 경우가 드문 것 같다. 취향이나 관심사의 차이인가. 나도 아들을 낳으면 이 책이 전과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지.
2. 읽어보지 못한 러셀의 저서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전에도 밝힌 적이 있지만, 러셀의 저서들을 계속해서 읽는 것이 효율적인 독서같지는 않다. 그의 책들을 너무 많이 읽어왔다. 하지만 나로선 어쩔 수가 없다. 너무나 그의 팬이기 때문에.
'인기없는 에세이'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처럼 일반 교양을 쌓기에 충분히 좋은 책이다. 아주 재미있기도 하다. 책의 부제가 무려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이다! 러셀은 특별히 어리석은 열살배기 꼬마가 아니고선 이 책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솔직히 그렇지는 않다. 서양철학 전반에 대한 교양수준의 지식은 있어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종교와 과학'은 유명한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와 비슷한 주제의 책이다. 허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여러 칼럼들을 엮은 형식인데, '종교와 과학'은 일관되게 하나로 집필되어졌다는 점에서 더 좋다. 역자에 의하면 '종교와 과학'은 러셀이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크게 기여한 책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더 풍부하고, 더 선명하게 종교와 과학에 대한 러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역시 난이도인데, 쉬운 책은 아니다. 아마도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보다 더 어려워서 덜 대중화된 게 아닐까.
3. 경제나 사회, 정치 등에 관해서는 웹서핑을 하다보면 수준높은 블로그들을 많이 발견한다. 아무래도 관련 분야에 몸담은 사람들이 많이들 블로그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반면에 철학에 대한 좋은 블로그는 확실히 드물다. 학문 자체가 대중적이지 않고, 역동성이 떨어지는 탓이 크겠다. 다른 분야처럼 활발한 리플 등으로 의견이 교환되고, 수정되고, 발전될 여지가 적다.
간혹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철학쟁이의 말장난이 나는 싫다.'와 같은 비판을 접하면 안타깝더라. 철학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꽤나 맞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사실은 편견에 불과한 걸 아주 모호하게 포장한 이론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심오한 양 오해되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데.
4. 공중보건의로 복무하면서 이런저런 경험도 했고, 진료도 열심히 했고, 책도 참 많이 읽었다. 시간을 허투로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지나고보니 내가 잘 살아가는걸까 회의감이 든다.
얼마 전에 이미 치과 개원도 했던 고교 선배가, 최근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형은 생화학 박사인데, 치과의사 면허도 취득했고, 이번에는 금융분야로 MBA 유학을 갔다고 한다. 안면이 있는 사이는 아니인데, 대학원 선배 한 분은 공중보건의 3년 간 사법고시를 준비해서 이번에 연수원에 들어갔다더라. 참.. 다들 가방끈이 길기도 하다.
어째서 또 커리어를 바꾸는지 시간이 아깝다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나만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찌보면 공부가 가장 쉽다. 새로운 걸 배우고, 진보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전문직 자격증이나 근사한 외국 학위가 따라온다면 더 좋다. 그리고 둘 모두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고, 사회적으로도 막강한 힘이 있다.
하지만 다시 공부를 하게되면 그만큼 돈과 시간이 희생된다. 또한 자격증이나 학위는 어찌보면 가장 성취하기 쉬운 것이고, 내 가치의 본질도 아니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커리어에 부합하는가가 중요하다. 커리어를 자주 바꾸는 건, 결국은 시간낭비를 하는 것이다.
결국은 가장 좋아하는 것, 가장 이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둘이 일치하지 않다면 절충하거나 과감한 결단을 해야한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삼십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잘은 모르겠다.
p.s : 사진은 어머니표 계란빵.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어머니가 해주시는 간식이다. 뜨끈뜨끈할 때 먹으면 정말이지 너무 맛있다. 형용할 수가 없다.
2013년 10월 1일 화요일
흄의 철퇴
데이비드 흄은 아주 젊은 시절부터 빛을 발한 천재이다. 그는 절대적인 진리를 깨닫고 싶어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30살 즈음의 어린 나이에 너무나 파괴적인 결론을 발견해버렸다. 그 결과 그는 긴 세월동안 회의주의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한 때 싸이월드에서 유행하던 꿈을 잃은 축구천재 카카의 스토리가 떠오른다)
그 뒤로 많은 철학자들이 흄의 회의주의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결국 흄 이후로 순수한 경험론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1. 흄의 파괴적인 결론은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다. 'A는 B의 원인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보통 이것이 논리학에서의 어떤 귀결(歸結)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것이라 여기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밥을 굶으면 배가 고프다.'는 명제를 생각해보면, 이것이 사실인 까닭은 밥을 굶으면 배가 고픈 결과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같은 원인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할 수 있는 근거는, 역시 지금껏 유사한 경험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순환논증에 빠져버리고, 인과관계란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얻는 귀납적 지식에 철퇴를 가한다.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고 지식을 쌓는 과정은 인과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계속해서 A가 B와 연관될 때, A는 B의 원인이다 라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모두 귀납적인 것이다. 나는 사탕을 먹으면 단 것을 알고, 잠은 안자면 피곤한 것을 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도 안다. 그런데 흄에 의하면 이 모든 생각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흄은 절망해서 '이성과 감각에 대한 회의주의적인 의문은, 근본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차라리 '부주의와 방심'을 택해서 회의주의를 벗어나야만 한다. 이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을 그냥 믿어버리고, 대충 즐겁게 살라는 말이다.
2. 흄은 말한다. '미래가 과거와 유사하다는 가정은, 어떤 논증 위에 세울 수는 없으며, 오직 습관에서 비롯될 뿐이다.' 그런데 이 주장을 가만히 보면, 흄이 이야기하는 습관 역시도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다. 경험이 습관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믿게되는 심리적 경향도 그 근거는 오로지 경험에 있는데, 흄이 이것은 받아들이는 듯이 보이는 것은 묘하다.
흄은 절대적인 진리를 너무나 강렬히 추구했기 때문에, 자기의 결론에 크게 좌절했다. 하지만 귀납법을 통해서 필연성을 획득할 수는 없다고 해도, 개연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면 숨통이 트이게 된다. 많은 실례가 반복될 경우에 개연성은 점차 확실성에 가까워진다. 물론 그럼에도 결코 필연성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연성을 인정하면, 이를 바탕으로 추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개연성은 분명히 경험을 벗어나 있어야 한다. 개연성이 경험에 근거한 원리가 되면, 개연성에 입각한 귀납의 원리는 순환논증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한 경험론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흄의 철퇴를 피할 수 없다.
3. 생각해보면 인과관계라는 개념은 우리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에 근거한다. 우리는 욕구가 생기면, 반응하고, 욕구가 해소되는 일련의 본능적인 과정을 밟는다. 결국 우리 인간은 원인과 결과를 늘 정의하고, 짝지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인간의 의식구조 안에서만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인과관계와 그에 근거한 귀납법이 없으면, 거의 모든 과학이 성립하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흔히들 F=ma라는 것이 대단한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공식이 실험결과와 일치했기에 우리가 믿는 것에 불과하다. 경제학자나 통계학자들은 자주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저 둘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흄의 관점으로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인과관계란 강한 상관관계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100만번 실험해서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100만 1번째에 이르러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이와 같은 걸 일일이 따지고 사는건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경제분석과 같이, 극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를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흄의 철퇴를 늘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p.s : 사진의 요리는 무슨 베네딕트라는데 잘 기억이 안나고, 장소는 청담동 '퀸즈파크'. 된장들의 성지라고 모 양이 소개하고 데려갔던 가게다. 정말 재미있다. 된장들의 성지라니.. 맛이고 뭐고 잘 모르겠는데, 분위기좋고 사람구경하는 재미는 확실하다.
2013년 9월 28일 토요일
끄적이는 이야기
남녀의 성적 매력은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데,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그 변곡점이 더 빠르고, 경사도 더 가파르다. 때문에 결혼적령기의 여성들은 세월의 변화에 아주 기민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적절한 남성을 만나기 힘들어진다.
남녀의 사회적 위치를 피라미드로 그릴 때, 남성은 자신보다 피라미드의 낮은 곳에 위치한 여성들은 주로 선호한다. 반면 여성은 자신보다 높은 위치의 남성들에 대한 선호를 가지는 게 보통이다. 수요공급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피라미드의 높은 곳에 위치한 남성은 같은 위치의 여성보다 유리한 입장이 된다.
작년 연말에 올해의 계획을 연애로 세웠던 기억이 난다. 제대로 연애를 했는가는 의문이지만 참 많은 이성을 만났다. 다양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삶과 가치관을 들었다. 나에게 사랑이 가지는 의미는 무얼까,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란 무얼까 헤아려보게 된다.
1. 과거 나는 짝사랑을 할 때 가장 열렬했다. 거절을 당하면 더 감정이 부풀어오르곤 했다. 돌이켜보면 시련을 넘어서는 큰 사랑의 모티브에 취했던 시절이었다. 사랑의 상대방은 실제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내 각본 안에 억지로 구겨넣어진 배역으로서 나에게 보여졌다.
연애 시절도 다르지 않았다. 연애를 마친 뒤에야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고, 광기에 사로잡혔던 스스로에 크게 놀랐다. 최면에 걸렸던 것만 같더라.
요즘의 나는 사랑에 조금 냉소적이다. 현실적인 조건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고, 조건이 맞는 것에 한하여 친구를 사귀듯이 편안하고 원만한 관계를 맺어가는게 사랑인 것 같다. 내 또래 많은 젊은이들이 나 정도의 사랑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도 안다. 이것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야위고, 메마른 사랑관이다.
2. 현실적인 조건에 집중해도 고민은 계속된다. 무엇이 좋은 조건일까. 어떤 성격이 좋은걸까, 어떤 직업이 좋은걸까, 나이대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부모님은 어떤 분이 좋을까.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도 순위란 매겨지지 않는다. 물론 위의 질문들이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성격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휴리스틱(heuristic)에 의지하게 된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상대는 없겠지.
3. 새벽에 잠에서 깨었다. 대단한 성찰이 나올 수 없는 주제이지만, 진짜 나의 이야기니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그대로 블로그에 끄적여보았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 나약함과 강인함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모두 다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가끔 라디오나, 티비 프로 등을 접하다 보면, 아내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이 나온다. 거기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함께 삶을 살아가며 만들어 낸 단단한 사랑을 본다. 문득 사랑이라는 게 신파극에 나오는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너도, 다른 누구라도 얻을 수 있는 게 사랑이다.
어지러운 글이다.
p.s : 사진은 가로수길의 디 오리지날 팬케이크 하우스. 지인이 미국에 본점이 있는 괜찮은 체인이라며 데려갔던 곳이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환자 이야기
1. 어제는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를 보았다. 홍상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 건 저번 작품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부터인데, 한적한 상영관 안에서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키득거리며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영화였다.
며칠 전부터 오른쪽 위 어금니가 시려왔는데, 영화를 본 뒤 점심을 먹을 때는 오른편으로 씹기가 힘들더라. 다행히 동기가 병원에 세미나 준비하러 출근했다길래 잠깐 들러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치아 옆면의 2차 충치. 4년 전 전공의 선생님한테 치료받은 기억이 있는 그 부위에 다시 충치가 생겼다. 아마도 다음주부터 후배에게 치료를 받게 될 것 같다.
오른쪽 위 어금니는 타고난 위치가 좋지 않다. 가지런하지 않고 앞쪽으로 조금 뻐드러져 있어서, 이 사이에 음식물이 잘 낀다. 그래서 학생 때부터 자주 치실로 청소해왔는데 동기의 말로는 옆면이 오목해서 치실로도 청소가 완전히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결국 탈이 난다.
의사들은 진단 초기에 항상 가족력을 묻는다. 사람의 치아도 타고난 타액의 양, 점성, 치열, 치아의 강도 등이 예후를 상당부분 결정한다. 특별히 튼튼하다면 내비둬도 탈이 안나고, 특별히 취약하면 아무리 열심히 관리해도 탈이 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보통의 위험도를 타고난 경우에 관리가 가장 효과적이지 있지 않을까.
어쨌든 오랜만에 치과체어에 누워서 마취주사도 맞고, 이런저런 검진도 받으니 묘하더라. 겪어봐야 환자분들 심정을 안다!
2. 신경치료를 한 환자분 한 분이 몇 주째 난리이다. 매번 치과체어에 앉을 때마다 심호흡을 하고, 코를 푸는 등 극도로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경치료 도중 치아벽이 뚫리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치료를 완료한 뒤에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재치료를 권하였는데, 발치 가능성을 고지한게 문제가 되었다. 이를 뽑는 것에 아주 큰 공포를 가지고 계셨던 모양이다. 결국 재치료를 나에게 받기를 거부하셔서, 타 병원에 가시라고 진료의뢰서를 작성해드렸다.
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여러번 전화로 나에게 소리도 지르고, 하소연도 하셨다. 지난 주에는 별안간 핸드폰으로 전화가 와서 받으니 체중이 5킬로 줄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안된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고싶다, 평생 나를 원망할 것 같다 등의 말씀을 하시더라.
해당치아의 통증은 심하지 않고, 의뢰서도 잘 써드렸고, 곧 재치료가 시작될 것이며, 충분히 완치될 희망이 있는 상태인데 이런 긍정적인 면은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이런 환자에겐 대체 어떻게 해야하나 막막하다. 치료 중 사고를 낸 것은 분명히 내 책임이다. 하지만 재치료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나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환자의 심리적인 반응은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는 것 같아서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나는 신이 아니다. 앞으로도 수십년 간 환자를 치료할텐데 또 이런 환자가 발생하지 않으리라 어떻게 믿나.
음. 지금으로선 의뢰드린 병원에서 잘 치료해서 환자분이 꼭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2013년 9월 15일 일요일
대기만성형 예술가
1. 요즈음 정치이야기에 빠져있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울분에 차기도 하고, 가끔은 통쾌하고 속이 시원하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가 재미에 비해서 남는 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일까? 물론 정치의 밑바탕엔 사회와 국가에 대한 해석, 경제원리의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과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행위로 실천되는 과정은 지켜볼 게 못되는 것 같다. 왠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아마 무력감 때문이 아닐까.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이 나라의 많고 많은 국민들도 내 마음과 같지 않다. 내가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선거 때마다 내 한 표를 행사하는 것뿐이다.
2. 얼마 전에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 읽고는, 엉뚱하게 바로 직전에 읽은 Malcolm Gladwell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What The Dog Saw)'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책 안의 챕터 '대기만성형 예술가들(Late Bloomers)'.
작가에 의하면 피카소의 경우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평균적으로 4배 비쌌다고 한다. 반면 세잔의 경우 6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젊은 시절에 그린 작품들보다 최대 15배 비쌌다. 세잔은 대기만성형 예술가였다.
우리는 흔히들 천재성과 창조성은 젊은 날부터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에 의하면 이는 대기만성형 예술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작가 벤 파운튼은 변호사로 일하다가 30세가 되어서야 소설가로 전향했다. 그리고 ‘체 게바라와의 짧은 만남’이라는 작품으로 촉망받는 신진작가의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그 작품은 그가 30번 이상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고, 발표도 못한 장편을 4년 간 쓰는 등의 ‘어둠의 시기’를 견뎌낸 이후에 비로소 완성된 것이었다. 그는 48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첫 출세작을 내놓았던 것이다.
갈렌슨의 ‘늙은 대가와 젊은 천재들’에 의하면 벤 파운튼이나 세잔과 같은 대기만성형 예술가는 아주 실험적으로 창작 작업을 한다. 그들은 목표가 분명하지 않고, 과정이 아주 점진적이다. 그들은 천천히 자신의 길을 찾고, 갈고닦는 완벽주의자이다.
벤 파운튼은 ‘체 게바라와의 짧은 만남’의 배경이 된 아이티를 30번 이상 방문했다. 세잔은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초상화를 그릴 때 3개월간 80번 넘게 작업을 해야했다.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수십 번 뜯어 고치고, 포기한 끝에 거의 10년 만에 겨우 완성했다.
갈렌슨에 의하면 젊은 천재들은 막연한 탐험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념적으로 창작 작업을 한다. 명확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조사’나 ‘실험’보다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천재성과 창조성은 늘 젊은 날부터 빛을 발하는게 아니다. 대기만성형 예술가는 자기 분야를 늦게 찾은 것이 아니다. 세잔은 피카소만큼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들의 재능이 늦게 발견된 것도 아니다. 세잔의 초기 작품은 그의 비전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수준이 떨어졌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대기만성형 예술가는 환경의 도움을 받아 '길러진다.' 벤 파운튼은 긴 인고의 세월동안 아내의 든든한 지지를 받았다. 세잔은 에밀 졸라, 피사로, 앙브로와즈 볼라르, 루이 오귀스트 등의 후견인들로부터 막대한 도움을 받았다.
유시민이 타고난 천재인지, 만들어진 천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경제학 전공자임에도 정치철학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더라.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을 몸소 체험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상들을 공부하고 자기 것으로 녹여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도 참 잘 쓴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경험하고, 글짓기를 해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자극이 되었다.
3. Malcolm Gladwell의 이 책은 그의 다른 히트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떨어진다. '아웃라이어', '블링크', '티핑포인트'를 모두 읽었다면 한 번쯤 구입해 읽어볼만한 수준. 우선 작가가 잡지에 기고한 칼럼들을 골라서 엮은 책이라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성이 부족하다. 칼럼들의 수준도 들쑥날쑥한 면이 있다.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한 챕터도 꽤 있었다.
2013년 9월 6일 금요일
책을 읽더니 잡담
Paul Krugman의 저서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는 미국에서 작년에 발매된 책이다. Krugman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며 소개하던 게 기억이 난다. 책 내용의 시의성을 고려할 때, 너무 늦게 번역된 감이 있다. 또 나처럼 그의 블로그를 꾸준히 읽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없다. 그럼에도 한 권의 책으로 읽는다는 건 의미가 있다. 큰 흐름 안에서 방향성을 가지고 독서할 수 있고, 내용을 종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경제공부 삼아서 지난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Hubris님, indiz님, 그리고 Paul Krugman의트위터와 블로그를 읽는다. 뉴스 페퍼민트도 도움이 된다. 그 외에는 '김광진의 경제포커스'를 들었었는데, 프로그램이 폐지된 뒤론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를 듣는다. 이만큼도 장기적으로 계속 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버클리 김 사장 같이 Mankiw처럼 Krugman과 다른 시각을 가진 경제학자의 블로그도 함께 읽는 이가 있다. 링크한다. 나에게 권해주기도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읽지 않을 생각.
결국 시간과 효용의 문제다. 나는 영어를 못해서, 읽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Krugman이 블로그에서 자주 인용하고 추천하는 Mark Thoma의 블로그가 있다. 역시 링크한다. 한 때 함께 읽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무리라고 판단했다.
경제란 데이터의 수집과 해석의 학문이다. 데이터의 수집은 아무나 할 수 없으나, 해석은 누구나 가능하다. 하지만 알고보면 수집 못지않게 해석도 아주 전문적인 것이라서, 전문가가 아니라면 올바른 시야를 가지기 어렵다. 그래서 Krugman이 나의 고정관념을 깨뜨려줄 때 특히 고맙다.
나같이 진보적인 경제관을 가진 사람은 흔히들 국가가 개입해서 고부가가치의 제조업을 육성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가지게 된다. 장하준 교수님도 저서나 인터뷰 등에서 자주 이를 언급한다. 그런데 Krugman은 저서 '기대감소의 시대'에서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국가주도의 제조업 육성이 국제무역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기대감소의 시대'는 1997년도에 쓰여진 책이다. 그러므로 장하준 교수님의 이야기가 최근의 학계 입장을 더 정확히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Krugman은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에서 고소득층 증세안에 대한 전통적인 진보측 논리를 비판한다. 우리는 흔히들 '낙수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근거로, 고소득층은 소득에 합당한 수준의 소비를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고소득층은 지나치게 저축하고,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의 소득이 더욱 궁핍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그러므로 양극화는 사회전반의 소비를 위축시켜서 경제의 성장을 억제한다는게 흔히 접하는 진보측 논리이다.
하지만 Krugman에 의하면, 최근의 연구는 이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양극화는 소비를 촉진한다는 게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한다.
경제위기 이전에 미국의 고소득층은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증가하는 소득에 걸맞게 소비하고 저축했다. 문제는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이었다. 이들은 양극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저축률이 떨어지고 소비가 증가했다. 맞다. 생각해보면 미국의 경제위기는 지나친 소비로 인해 발생했고, 소비의 위축은 그 결과이다. 양극화는 경제위기를 일으켰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그러한 방식은 아니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부를 추종하는 문화가 만연하여 지나친 소비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온전히 사치를 좇는 군중심리의 탓으로 돌리긴 힘들다. 가령 양극화가 좋은 학교에 자녀를 진학시키기 위한 경쟁을 심화시켜서 교육비 지출을 늘렸고, 위험한 부동산 투자 열풍을 불러와 부동산 거품을 부추겼다는 분석이 있다.
위와 같은 연구결과가 고소득층 증세안을 부정한다 보기는 힘들다. 1) 경제상황에 따라 계층 간 소비패턴이 다를 수 있다. 과거 활황기에 과소비를 부추긴 양극화가 경기가 위축된 요즘은 소비를 위축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2) 고소득층 증세안은 사회적 정의의 실현이기도 하다. 양극화는 더 교육받은 계층에, 더 사회적 기여가 큰 계층에 부가 분배된 결과가 아니다. 0.1%의 소득은 전통적인 수요 공급의 시장경제 원리가 아니라, 아주 정치적인 방식에 따라서 결정된다.
진보측 경제학자가 진보측의 전통적인 논리를 비판하면 아무래도 더 믿음이 가게 된다.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가 떠오르는데, 사실 요즘의 내가 그러하다. 가만보면 나처럼 중산층에 속한 사람일수록 돈을 조금 만지게 되면 더 과시적 소비를 하게 된다. 원래 잘 살던 애들은 패션에 관심이 많은 경우가 아니라면 오히려 검소한 듯.
아무튼 최근에는 신발에 꽂혀서 이것저것 샀다. 사진의 샌들도 무지 비싸게 샀는데, 신고 조금만 걸어도 발이 진짜 아프다. 같은 브랜드의 스니커즈도 가지고 있는데 역시 착화감이 좋지는 않더라. 친한 동기 누나의 명언이 있는데, '비싼 구두는 걸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라더라. 신고 '보여주기' 위한 거라고. 하하.
그렇다면 저 샌들도 미적 형태를 튼튼히 보존하고자 저리 딱딱하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게 아니고선 저리 비싼게 저리 불편하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
2013년 8월 25일 일요일
법인세 이슈와 잡담
1. 1년 가까이 '김광진의 경제포커스'를 열심히 챙겨들었다. 올 초에 봄 개편으로 이 프로가 폐지된 뒤로는 한동안 경제 관련 라디오를 듣지 못했는데, 최근에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를 듣기 시작했다. 차를 운전하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오며가며 허비하는 시간을 많이 채워준다.
얼마 전 방송에서는 법인세 인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잘 정리되어 이를 정리해본다. 1981년도 핀란드 법인세는 61.5%, 독일 60%, 일본 54.3% 등 전세계적으로 높았다. 80년대 이후 오늘날이 이르기까지 법인세가 1/3 수준으로 감소되었다. 원인은 두 가지다. 금융자유화와 세계화. 둘은 서로를 되먹임하며 국가 간에 법인세 인하 경쟁을 일으켰다.
개발도상국들이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법인세율을 낮추고, 경쟁국들이 이를 좇았다. 선진국들 역시 개발도상국들의 법인세 인하가 이해에 맞았기에 정책적으로 지지했고, 경쟁이 더해가면서 법인세 인하기조를 함께했다.
우리나라의 법인세도 80년대 초에는 50%를 넘었다. 우리나라의 법인세가 오늘날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나라의 법인세는 OECD 평균 세율보다 낮다. 게다가 OECD 가운데 우리가 추격해야만 하는 선진국들, 특히 G7은 우리나라보다 법인세가 월등히 높다. 우리나라보다 법인세가 낮은 OECD 가입국들은 슬로바키아, 체코 등 동유럽에서 뒤늦게 체제 전환을 한 나라들이다. 최근 경제가 안좋다며 법인세를 낮춘 일본도 25% 이상으로 우리보다 높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각종 공제를 많이 받아서 법인세의 실효 세율이 엄청나게 낮아진다. 삼성전자가 실제로 내는 법인세가 10~15%이다. 명목세율이 24.2%인 것과 비교하면 공제가 지나치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법인세 인상에 반대하는 이들의 방어논리 가운데 대표적인 주장이 GDP 대비 법인세 비중이다. GDP 대비 법인세 비중을 보면 우리나라가 OECD 평균보다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법인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는 통계를 그릇되게 인용한 것이다. 우선 GDP보다는 GNP나 GNI와 법인세를 비교하는 것이 옳다. GDP는 외국자본이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것도 포함되며,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가치는 포함이 안된다.
또한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법인에 대한 조세율이 낮은데도 GDP 대비 법인세 비중이 높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법인들이 막대한 소득을 거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 통계 결과는 우리나라 경제에서 법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우리나라의 기업/가계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한 지경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 자료를 기업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서 잘못된 해석을 붙여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2. 존 듀이의 책 두 권을 모두 읽었다. 철학에 관련된 포스팅은 철학의 발전과정에 맞춰서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참 쓸데없는 생각인 거 같다. 하하. 곧 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지. 책 욕심에 5권의 책을 추가 주문했다.
읽어야만 하는 책들이 많다. 열심히 살자.
국가란 무엇인가/유시민 저/돌베게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말콤 글래드웰 저/김태훈 역/김영사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폴 크루그먼 저/박세연 역/엘도라도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1,2/데이비드 바사미언 인터뷰/김용민 삽화, 강주헌 역/시대의창
3. 개업에 대한 고민이 많지만, 해결이 쉽지 않다. 뭐 아직 본격적으로 준비한 게 없기는 하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아, 사진의 보쌈은 압구정역 근처 '춘천막국수'. 유명하다던데 괜찮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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