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5일 금요일
듀이의 실용주의
듀이는 실용주의자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실용주의라는 건 항상 '무언가'를 위한 실용성을 강조하는 것이니까, 자연히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실용주의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라온다. 이에 대해 분명히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듀이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들을 두 가지 꼽자면, 진화론과 헤겔의 철학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진화론과 과학의 경험주의는 당대의 시대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환경이 변화하면 어떤 생물은 살아남고, 어떤 생물은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은 생물은 자손을 번식할 수 있다. 이 자손도 또다시 환경의 변화를 겪고, 변화의 과정이 반복된다. 생물만이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듀이의 시대에 과학기술의 발달과 급속한 산업화는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생물과 환경은 서로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되먹임 작용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여기서 듀이는 끊임없는 '변화'와 '상호작용'이 세계의 중심원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동성은 헤겔의 철학과 조화될 수 있었다. 듀이는 과학의 기반이 되는 경험을 중시했고, 헤겔의 관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헤겔의 변증법은 실제 세계를 반영하는 올바른 틀이라고 생각했다. 듀이는 어떤 철학도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떤 철학도 진공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그게 속한 시대상이 투영된 반영물이고, 그 가치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달라진다. 당대에 가치가 있는 철학도, 새로운 시대에서는 그 가치를 잃고, 오히려 해를 끼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에 대한 해법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듀이는 과학에 그 해답이 있다고 보았다. 과학은 경험적인 학문이다. 교조적인 진리로부터 연역된 것이 아니라, 귀납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늘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다양한 해법을 그 '결과'를 가지고 검토하게 된다. 듀이가 보기에 이러한 과학적 방법이 특정한 영역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채택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듀이의 실용주의는 오늘날의 상식과도 잘 조화되고, 아주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런저런 의문이 생긴다. 버트런드 러셀은 듀이와 많은 부분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의 실용주의적 입장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을 경계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우리에게 지금 비가 오고 있는지를 물어봤다고 하자. 이럴 때 듀이의 실용주의를 채택하게 되면, 우리는 그에게 비가 온다고 답했을 때 빚어질 결과와, 오지 않는다고 답했을 때 빚어질 결과를 헤아려서 둘 중 어느 답변이 더 이로운가 판단해야만 한다. 비가 오는 것이 실제 사실이라면, 이러한 태도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비가 오는 것이 사실이라고 언제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인식론에 대한 러셀의 입장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러셀은 반대 증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지각에 대한 믿음을 철회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러셀의 생각에는 실제로 비가 오고 있다면, 그 사실을 그대로 답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러셀은 실용주의가 교조적으로 되어, 눈앞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천박한 사회풍조를 낳을 것을 우려했다. 물론 듀이도 실용주의가 독단적인 원칙으로까지 교조화되기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의 각종 사회문제들이 미신이나 관습, 비이성적인 충동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았고, 과학적인 태도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많은 사회문제들이 서로 다른 가치들의 충돌을 담고 있고, 이는 과학적인 태도로 결과를 평가하고,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치란 것은 정량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가치들을 비교할 수도 없다. 가치 간의 충돌은 '취향'의 차이를 반영할 때가 많다. 어떤 이는 오늘날의 사회가 지나치게 역동적이라고 비판한다. 지금의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 사회를 이루어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오늘날의 사회가 '지나치게' 역동적인지 아닌지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듀이의 실용주의는 문제들이 보다 구체적이고, 특정 영역에 국한될 때 큰 도움이 된다. 경제학은 듀이의 바람대로 사회문제를 과학적 방법을 통해 접근하는 학문이다. 가령, 저축이라는 개인의 미덕은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한다. '미덕'에 대한 교조적 생각에 사로잡히면, 사회 전체에 손해를 입힐 수도 있는 것이다.
헤겔도, 마르크스도, 변증법의 결과는 계속되는 '진보'라고 했다. 사실 왜 변화가 필연적으로 '진보'를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엄격하게 보면, 진화론의 진화도 환경에 대한 적응을 의미할 뿐이다. 진보라는 건 인간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일지도 모른다. 나도 때때로 좌절하고,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지만, 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듀이도 실용적인 의미에서 이런 나의 생각을 지지해주지 않았을까.
p.s : 사진은 이촌동 '동강'의 유린기. 처음 먹었을 때는 완전히 반했었다. 요즘에는 입맛이 변했는지 전같이 감동적이지는 않더라.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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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듀이가 말한 경험의 정의와 종류에 대해서 알려주실수있으신가요???
너무 답글이 늦었습니다. 이 블로그를 버려두고 있었기에.. 듀이의 저서를 한창 읽고 쓴 포스팅인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고 내용을 많이 잊었습니다.. 어렴풋한 제 기억에 듀이의 경험에 대한 정의는 우리의 상식적인 정의랑 다르지 않았어요. 엄밀한 답변 못드려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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