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환자 이야기
1. 어제는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를 보았다. 홍상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 건 저번 작품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부터인데, 한적한 상영관 안에서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키득거리며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영화였다.
며칠 전부터 오른쪽 위 어금니가 시려왔는데, 영화를 본 뒤 점심을 먹을 때는 오른편으로 씹기가 힘들더라. 다행히 동기가 병원에 세미나 준비하러 출근했다길래 잠깐 들러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치아 옆면의 2차 충치. 4년 전 전공의 선생님한테 치료받은 기억이 있는 그 부위에 다시 충치가 생겼다. 아마도 다음주부터 후배에게 치료를 받게 될 것 같다.
오른쪽 위 어금니는 타고난 위치가 좋지 않다. 가지런하지 않고 앞쪽으로 조금 뻐드러져 있어서, 이 사이에 음식물이 잘 낀다. 그래서 학생 때부터 자주 치실로 청소해왔는데 동기의 말로는 옆면이 오목해서 치실로도 청소가 완전히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결국 탈이 난다.
의사들은 진단 초기에 항상 가족력을 묻는다. 사람의 치아도 타고난 타액의 양, 점성, 치열, 치아의 강도 등이 예후를 상당부분 결정한다. 특별히 튼튼하다면 내비둬도 탈이 안나고, 특별히 취약하면 아무리 열심히 관리해도 탈이 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보통의 위험도를 타고난 경우에 관리가 가장 효과적이지 있지 않을까.
어쨌든 오랜만에 치과체어에 누워서 마취주사도 맞고, 이런저런 검진도 받으니 묘하더라. 겪어봐야 환자분들 심정을 안다!
2. 신경치료를 한 환자분 한 분이 몇 주째 난리이다. 매번 치과체어에 앉을 때마다 심호흡을 하고, 코를 푸는 등 극도로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경치료 도중 치아벽이 뚫리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치료를 완료한 뒤에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재치료를 권하였는데, 발치 가능성을 고지한게 문제가 되었다. 이를 뽑는 것에 아주 큰 공포를 가지고 계셨던 모양이다. 결국 재치료를 나에게 받기를 거부하셔서, 타 병원에 가시라고 진료의뢰서를 작성해드렸다.
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여러번 전화로 나에게 소리도 지르고, 하소연도 하셨다. 지난 주에는 별안간 핸드폰으로 전화가 와서 받으니 체중이 5킬로 줄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안된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고싶다, 평생 나를 원망할 것 같다 등의 말씀을 하시더라.
해당치아의 통증은 심하지 않고, 의뢰서도 잘 써드렸고, 곧 재치료가 시작될 것이며, 충분히 완치될 희망이 있는 상태인데 이런 긍정적인 면은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이런 환자에겐 대체 어떻게 해야하나 막막하다. 치료 중 사고를 낸 것은 분명히 내 책임이다. 하지만 재치료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나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환자의 심리적인 반응은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는 것 같아서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나는 신이 아니다. 앞으로도 수십년 간 환자를 치료할텐데 또 이런 환자가 발생하지 않으리라 어떻게 믿나.
음. 지금으로선 의뢰드린 병원에서 잘 치료해서 환자분이 꼭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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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오늘 마음쓰이는 일이 있었는데 잘 되길 바라는 마음만 남겨야겠어요.
우리선희 찜해 둔 영환데 보셨다니 더 보고싶 어지네요~
Sangl Yun/ 예 모두가 겪는 과정이니 더 좋은 의사가 되기위해 노력해야죠. 우리 선희는 꽤 코믹해요. 가벼운 마음으로 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벌써 가을이네요 환절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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