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공보의가 하는 생각
1. 공중보건의로서 진료를 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공무원처럼 정해진 급여를 받으며 진료를 할 뿐만 아니라, 환자분들도 무료 내지는 정해진 적은 금액만 납부하면 된다. 대체로 경제적 사정이 안좋은 노인 환자분들을 상대하다보니 요즘엔 주로 치주수술에 마음을 쏟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잇몸에 염증이 장기간 진행된 노인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치주수술이란 주로 치석을 제거하거나 잇몸, 골을 성형하기 위해 시행하는 술식이다. 문득 생각해보니, 임플란트가 치주 분야도 참 많이 바꿔놓았다.
임플란트 이전에는 존재하는 치아를 최대한 뽑지않고 유지하는 것이 치료의 목적이 되어서
치석 제거 뿐만 아니라, 위생적인 형태로 골을 성형하는 것도 중요했다. 임플란트 덕택에 건강하지 못한 치아의 가치는 줄어들었고, 임플란트가 식립될 골의 가치는 증가했다. 덕분에 적극적인 골 삭제를 요구하는 치주수술은 요새 거의 시행되지 않는 것 같다.
보존치료에 속하는 신경치료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환자와 술자 모두 고생하는
신경치료의 가치가 임플란트의 등장으로 줄어들었다. 문제가 되는 치아를 임플란트로 대체해도 환자가 어느정도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첫 번째 신경치료가 실패한 뒤 시도하게 되는 재신경치료나 치근단수술, 치아재식술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아무래도 성공률이 낮거나, 침습적인 치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중보건의는 환자에게 청구하는 금액에도 부담이 없고, 급여도 일정하기 때문에 발치를 하기 전에 최대한 다른 치료를 시도해볼 수가 있다. 나에게 의지가 있고 환자가 치료 과정을 견뎌낼 용의만 있다면.
가끔 의사가 좋은 진료를 하는데 시장경쟁이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걸 깨닫는다. 시장에서 형성되는 진료의 가격과 진료가 가지는 실제가치가 불일치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치아를 살릴 가능성, 환자와 술자의 노동만 고려해서 술식을 시도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는 치과의사의 이윤이나 평판, 환자의 비용 등도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건강보험제도는 보험/비보험진료로 구분하고 더욱 복잡한 영향을 미친다.
2-1. 시장경제의 원리로 의료계가 돌아가다보니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발생한다. 긍정적인 면은 아무래도 진료동기일 것이다. 이윤은 의사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고민하게 한다. 부정적인 면은 이윤동기와 공공의 목적이 부합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치과의 경우에도 보험수가에 묶여있는 신경치료 가격이 임플란트의 1/10 수준인 것은 신경치료에 대한 인센티브를 떨어뜨리고, 임플란트에 대한 인센티브를 증가시킨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가 이런 점에서 아쉽다. 건강보험제도가 환자들에게 싼 가격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주지만, 의사들을 더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비보험 진료로 유인한다. 의사들의 지역, 진료과목 편중에 대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추세는 조금 속상하다. 수익이라는 미명 하에 의사로서의 소명의식과 긍지가 희생되고, 환자 역시 마땅한 권리를 잃는다.
또한 우리나라는 의사가 먼저 진료를 하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나중에 진료 내역을 검토하고 보험급여를 지급하거나, 과다청구 등의 이유를 들어서 삭감할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는 의사가 진료를 하기 전에 먼저 보험회사에 진료 계획을 알리고, 보험회사가 검토 후 보험급여를 지급하기로 하면, 그에 맞춰서 진료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급여를 삭감당하면, 의사는 진료비를 받을 수 없고, 환자에게 과잉진료를 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즉 그 피해는 의사에게 간다. 미국에서는 급여를 거부당하면, 환자가 원하는 진료를 받을 수 없다. 그 피해는 환자에게 간다. 정부나 보험회사는 똑같이 지출을 줄이려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의사가 정부와 대립하고, 미국은 보험회사가 환자와 대립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의사는 '이익에 눈이 먼 기득권'이라는 비난을 받고, 미국에서는 보험회사가 그런 비난을 받는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의사들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제도에 비판적일 수 밖에 없다.
주변의 여러 사례를 들어보면 재정 지출 삭감에만 초점을 맞춘 급여삭감으로 정당한 진료를 한 의사들에게 피해를 준 경우도 상당히 많다. 인간이 다루는 제도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안타까운 일이다.
2-2. 개인적으로는 건강보험제도를 현행대로 유지할 것이라면, 크게 봐서 보험의 보장성은 넓히고 환자의 개인부담금은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은 거 같다. 무엇보다 기본 진찰 비용이 높아질 필요는 있다.
첫 째로 진찰도 비용이 필요한 서비스 임을 환자들에게 알릴 수 있고, 둘 째로 의료쇼핑이나, 불필요한 내원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가 진료에 대한 개인부담금이 증가하면, 보다 고비용의 진료를 보험이 보장해줄 수 있는 재정적인 여력을 가지게 된다.
지금과 같이 더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신경치료보다 비보험인 임플란트가 10배 이상 비싼 상황에서 의사의 양심에만 기대는 정책은 어리석다. 보장성이 확대되어 신경치료와 임플란트의 가격차이가 줄어들면 치과의사들이 치아를 살리는 치과의사 본연의 사명감을 충족시키면서 합당한 이윤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의사들의 지역 편중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쇠퇴해가는데 서울 출신이 대부분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상류층에 해당하는 의사들이 수도권을 선호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정책적으로 의사들을 지방과 시골에서 근무하게 할 좋은 인센티브를 제공해 주어야만 한다. 가령, 현재 노르웨이나 스웨덴의 경우에는 '의료취약지 내 의과대학 설립'을 통해 의료 불균형을 해소하고 있고, 미국이나 일본은 '일정기간 의료 취약지내 의료 활동'을 조건으로 학자금 지원정책을 제공해주고 있다.
3. 보건소에 방문하는 환자들은 태반이 생계가 어려운 노인분들이다. 도와주고 싶은 순박한 환자들도 많지만 의욕을 잃게 만드는 환자들도 있다. 예를 들면 무임승차를 하려는 환자들이 그렇다.
얼마 전에 한 노인분이 보건소에 와서는 원하는 약을 내놓으라고 나를 닥달한 적이 있다. (나야 물론 이름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여기 올린다고 볼리도 없으니..) 진단결과 약 처방이 불필요해서 이를 거부했지만, 고함을 치고 삿대질을 하는 등 워낙에 막무가내라 결국 약을 처방해줬다. 직원 분의 실수로 환자분이 나간 다음에야 주소가 경기도 광주시인 것을 발견하고 허탈했다. 위장전입이었던 것이다. 노인 분들 중에는 약을 무조건 많이 타야만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참 많다. 어차피 싸니까 이득이라고 생각하시는 거다. 작년에 경남 병원선에 있을 때도 그랬다. 섬마을 환자들은 늘 '내가 낸 세금이 얼마인데..'라고 하시면서 파스는 꼭 두 장, 약은 가급적 많이 달라고 조른다. 사실 세금 거의 안내온 분들도 많고, 막상 약을 거의 안 챙겨먹는 분들도 많다. 몇몇 환자분들 집을 방문하면 몇달치 약이 쌓여있다. 어차피 공짜로 주니까 계속 쌓아놓으시는 거다. 어떤 용도인지도 모르시면서. (역시 마도에 전설적인 할머니가 계셨는데 밝히지는 않겠다) 아무튼 이런 문제는 나보다는 약 처방을 많이 하는 의과 분들이 훨씬 많이 겪는 스트레스일 것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더 가난한 사람이 더 부유한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다. 반대의 경우 역시 아닌 것처럼.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하는 법이고, 공짜 점심은 맛있는 법이다. 경제학자들은 공짜 점심은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케인즈의 말처럼 나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
우리네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나?
p.s : 사진은 얼마전 대학 동기들과 만나서 카드 게임을 친 날 찍은 칩들. 아 재밌었지. 포스팅 내용과는 0.01%의 관련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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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좋은 생각 읽고 갑니다. 요즘 의사들도 불만이 나름의 불만이 많으시겠지만. 환자들과 보험회사가 싸우는 것보다는, 의사와 정부가 싸우는게 더 나은 사회 같아 보이긴 하네요. - lafite
lafite/방문 감사드립니다. 미국 의료제도보다 우리나라가 나은 거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우리나라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해나가려는 노력도 필요한 거 같아요. 미국 덕택에 그런 면에서 국민들을 설득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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