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1일 토요일

Diet Coke 만세


 화학도 나의 정체성 가운데 하나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최근 다이어트 콜라가 심혈관계 질환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서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하지만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발표이므로 직접적인 인과관계와 구분지어야 할 것 같다.

 다이어트 콜라에 사용되는 합성감미료 아스파탐(aspartame)은 두 개의 아미노산(Asp, Phe)과 메탄올이 결합된 구조물이다. 구글링을 통해서 아주 친절한 그림을 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아스파탐은 대사과정에서 두 개의 아미노산과 메탄올을 내놓는다. 메탄올은 CH3OH의 분자식을 가지는 화합물로 술에 포함된 에탄올(CH3CH2OH)과 유사한 구조와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메탄올도 에탄올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대사되어, 포름알데히드(HCHO), 포름산(HCOOH)을 대사물로 내놓게 된다.
 술이 분해되어 형성되는 아세트알데히드(CH3CHO)가 숙취를 일으키듯, 이러한 대사물은 인체에 독성을 가지며, 특히 메탄올의 대사물이 지니는 독성이 더 강하다. 이는 수소(H)가 메틸그룹(CH3)보다 작아서, 이러한 입체효과(steric effect)가 포름알데히드와 포름산의 반응성을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이퍼콘쥬게이션 얘기는 생략하자)

 그러므로 동일량을 비교하면 아스파탐에 포함된 메탄올은 술에 포함된 에탄올에 비하여 독성이 강하다. 실제로 메탄올을 사람이 마시면 실명이 일어난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아스파탐이 설탕의 200배에 달하는 당도를 가진다는거다. 콜라에 들어가는 설탕의 양은 소주에 들어가는 알콜의 양보다 적다. 게다가 다이어트 콜라에는 그러한 설탕의 200분의 1에 해당하는 소량의 아스파탐이 들어간다.
 그러므로 다이어트 콜라에 포함된 아스파탐이 인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낮으리라 생각한다. 실제 미국 FDA도 하루 21캔의 다이어트 콜라까지는 문제없다고 권장하고 있다.

 그래, 나는 다이어트 콜라의 팬이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에 발암색소 논란으로 코카-펩시콜라가 콜라의 제조법을 바꾸기로 했다는 기사가 발표되었다. 슬픈 일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1. 옆의 사진은 오늘의 포스팅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회 음식의 사진. 지난 달 병원선에서 먹었던 근사한 점심이다.
 느슨한 긴장감으로 생산성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독서는 끊겼고, 블로그 follow up은 밀렸으며, 고정 수입도 줄었다. 다행히 주식투자가 성공하여 유동 수입에 높은 점수를 주게 될 것 같다. (이조차 현금화되어있지 못하다)
 병원선에서 보내는 마지막 한달도 생산보다는 소비에 중점을 두게 될 것 같다. 지역을 옮긴 뒤 집중해야 할 사항들을 점검해보기로 마음먹고 있다.

2. 최근 미국채 10년만기 장기금리가 빠르게 상승했다. 미국채 10년만기 물가연동 국채가 마이너스 금리라는 것은 최근의 가격인하가 물가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앞으로 추가적인 부양책이 있을 것인가. 출구전략이 보다 빠른 타이밍에 이뤄질 것인가.
 지금 미국의 경제학계는 논쟁이 한창이다. 괄목할만한 점은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총재 윌리엄 더들리가 전에 비해 '매파'적인 견해의 발언을 내놓고 있다는 것이고, 결론적으로 추가적인 부양책의 가능성은 보다 희석되고, 출구전략의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은 보다 커지고 있다.
 내가 투자자라면, 요즘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시기일 것 같다. 뭐 일단 미국장기국채는 숏이 아닐까?

3. 과거 의료민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특히 치과분야에 한정하여) 다룬 적이 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당시 '고용의 문제'가 충분히 다뤄지지 못한 것 같다. 오늘날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동의한다면, 구체적으로 보다 많은 수의, 보다 양질의 고용을 달성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유추된다.
 그렇다면 이를 어떤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집약적인 성격이 있는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철강, IT 등)은 날이 갈수록 자동화되고, 많은 근로자들을 자영업으로 내몬다. 반면, 의료산업은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을 주며, 노동집약적인 성격이 있다. 의료산업의 민영화를 통해 많은 고용이 창출될 것이라는 주장은 이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용의 창출이 전에 거론한 바 있는 1)총수요의 증가와 2)의료비용의 증가가 가져오는 부작용을 상쇄할 만큼의 편익을 제공할 것인가?
 의료인의 수와 보험수가가 탄력적이지 못하므로 1)보험의 민영화가 선행하지 않는 한, 2)의료관광의 수요가 충분히 획득되지 않는 한, 고용창출의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그리고 보험의 민영화는 (다른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겠으나)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2012년 3월 30일 금요일

형제


 어제 형의 결혼식이 있었다. 옆의 사진은 형수가 왔을 때 어머니가 차리신 저녁. 특별한 정성이 느껴진다. (아마도 형수에겐 특별한 긴장감을 형성했으리라)
 결혼식장에서 형은 기대 이상으로 의젓하고 멋졌다. 그간 형이 얼마나 많은 일을 책임져야 했는지 나는 알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이 없었을텐데 이렇게 훌륭히 모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형이 지닌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성품 덕이다.

 많은 심리학자와 아동연구가들이 성장과정에 있어서 형제는 동지라기보단 경쟁자라고 말한다. 나 또한 우리의 성장과정을 돌이켜볼 때 이에 동의할 수 밖에 없지만, 성인이 된 이후 우리의 관계는 누구보다 든든한 동지이다.
 우리 형제는 오랜 시간을 서로 떨어져 지냈다. 내가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일찍 가족과 떨어진 탓도 있고, 무엇보다 형이 미국에 있고 내가 대전에 있던 대학시절이 그러했다.
 다시 서로가 함께 할 수 있었던 지난 5년간,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자주 토론하고 논쟁했다. 대화를 통해 형은 나의 자유분방하고 현실적인 사고에, 나는 형의 온건하고 가치지향적인 관점에 서로 영향을 받았다. 그 많은 대화의 시간이 없었다면 이런 유대감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 같다.
 형의 출국 이후에 조금 외롭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가족의 행복과 서로의 성공을 기원한다.

2012년 3월 20일 화요일

로스쿨 제도가 실패했나?


  한동안 보스턴의 김 사장님 취향에 맞춘 포스팅을 하기로 결심했으므로 로스쿨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한다. 친구들, 형과 여러번 토론했던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우선 청년층의 취업준비기간을 연장한다는 비판을 살펴보자.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지난 연말에 내놓은 보고서는 청년층의 실업자 수는 사실상 110만 명, 실업률은 22.1%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는 정부의 발표와 큰 괴리를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정부가 발표하는 실업률은 사실상 '사기'라고 생각한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319_0010804946&cID=11201&pID=11200

  로스쿨 입학지원자의 수가 약 1만명임을 감안할 때, 잠재인원을 고려해도 실업률 자체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게다가 로스쿨 제도가 사실상 사법고시를 대체함을 감안하면 이의 영향은 더욱 감소한다. 3년의 이수기간은 다른 대학원 제도와 비교할 때, 특히 의치대 학생들의 수련 기간까지 고려할 때 길지 않다.

  다음으로 사교육 시장을 확대한다는 비판을 보자. 로스쿨은 고교생의 입시 경쟁을 완화하지만, 사교육 시장을 대학졸업 이후로 연장하는데 기여한다. 이는 다소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허나 로스쿨 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는 건 사실상 사교육 시장의 확대나 취업준비기간의 연장이 아니다.

1. 로스쿨 제도는 법조인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나는 기존의 법조인 양성과정 및 로스쿨의 교육과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허나, 혼자 공부하는 것만 못한 교육과정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과정이 불완전함을 의미한다고 여기며 이의 보완을 고민해야 옳다고 여긴다. 달리말하자면,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수많은 고시생들이 골방에서 힘들게 공부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보다 나은 법조인의 양성방법이라는 주장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이거다.
 당장의 졸업생들이 수준미달이라며 로스쿨 제도가 실패했다는 주장은 의아하다. 로스쿨 제도는 이제 겨우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시행 초기에는 당연히 경쟁이 궤도에 오르지 않으므로 보다 입시가 수월하고, 교육과정에도 문제점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로스쿨의 졸업생들은 다양한 학문을 백그라운드로 가지는데 이것은 기존의 제도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장점이다. 졸업생들의 법지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이 점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부족한 법지식은 교육과 선발과정의 개선을 통해 극복해야지, 고시제도의 부활을 통해 극복해야할 성질은 아니다.

2. 다음으로 로스쿨이 고비용 구조로 인해 기회의 불평등을 심화한다는 비판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로스쿨 이수과정에 많은 돈이 들고, 선발과정에 투명성이 보장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로스쿨의 학비는 연간 2천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급이 아니고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더군다나 사법시험의 점수만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학벌, LEET, 면접, 서류 등 다양한 평가방식이 도입되므로 선발과정에 비리가 존재해서 고위층 자녀만이 선발될 것이란 비판이 많다.

  로스쿨과 관련된 논쟁에서 나는 우리 사회에 '사회적 정의'에 대한 합의가 결핍되어있음을 느낀다. '입시는 공평한 조건하에서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라는 명제에 모두가 동의한다면, 무엇이 '공평한 조건'인지 보다 명확해야만 한다.
  가령 시험점수는 공평한 조건을 보장한다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시험점수만으로 평가가 이루어지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1)시험 자체의 방법론이 존재하고, 2)우연의 개입이 용이하며, 3)능력의 형성과정에 대한 논의가 결핍되어있다.
  이 중 무엇보다 3)이 중요한데, 시험을 치르기 전에 무수히 많은 요소들이 조건의 불평등을 형성한다.
  가령 부잣집에서 태어나 고비용의 교육을 받은 학생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공부한 학생이 같은 시험을 치른다. 과연 여기서 획득된 시험점수가 공평한 조건을 보장하는가?
  법대생과 이공계 학생이 로스쿨에 지원했다면, 둘의 LEET성적을 같은 조건에서 비교해야 옳을까?

 능력을 공평한 조건에서 평가하려면, 교육의 불평등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부잣집 학생과 가난한 학생의 성적이 같을 경우, 가난한 학생에게 더 높은 잠재력이 있다고 봐야 옳다. 법대생과 이공계 학생의 성적이 같을 경우, 이공계 학생에게 더 높은 잠재력이 있다고 봐야 옳다. 이와 같이 '공평한' 조건은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고려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만 옳다.
1) 로스쿨의 선발과정에서 시험점수 외에 다양한 평가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옳다.
(구체적으로 평가방식에는 가정환경, 전공, 연령, 성별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2) 선발과정에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인 정비가 필요하다.
 결국 사법고시로의 회귀는 '공평한 조건'을 보장해주는 해법이 아니다. 로스쿨의 선발  및 교육과정의 정비가 옳다.

 또한 로스쿨의 학비 문제는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해소되어야만 할 것이다.
1) 가난한 학생을 보다 높은 비율로 선발한다. 2) 가난한 학생에 대한 장학 제도를 확대한다. 3)이미 논의했듯, 가난한 학생의 성장과정을 고려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당장 등록금의 절대적인 액수가 감소해야만 한다. 이는 능력을 공평히 평가하는데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1년에 2천만원이 말이 되냐..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지금의 로스쿨 제도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법고시로의 회귀로 해결될 수 없다. 로스쿨 제도는 마땅히 유지되고, 개선되어야만 옳다. 또한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서 '공평함'은 보다 증진되어야만 한다.

 사실 위의 논의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능력'이란 요소가 결코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은 '유전'이라는 방식을 통해 우연적으로 얻어진다. 또한 '사회'는 여러 형질 가운데 '특정한' 능력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하버드 대학의 정치철학 교수 Michael Sandel은 베스트셀러 '정의'에서 마이클 조던이 큰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농구를 잘하는 능력을 타고났으며, 우연히 농구선수에 높은 보상을 하는 사회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사회적 불평등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상이 전제되어야 허용된다고 말한다. 롤스에 의하면 법학을 공부하기에 이상적인 유전자를 타고났다면, 자신의 재능에 보상을 제공해주는 사회에 부채를 가진다. 그러므로 이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상을 통해 해소해야만 하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레주의 강력한 철학적 토대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나부터 착하게 살자.

p.s : 전체적인 일관성 때문에 법조계의 '기수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사실 그것이 내가 로스쿨 제도를 강력히 지지하는 이유이다. 당신들이 문화를 바꿔주길 바랍니다.

2012년 3월 17일 토요일

문제의 본질

1. 외국인이 10조원 이상을 매수하면서 올해의 주식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보유 주식은 396조 가량으로 전체 주식의 약 30.7%이다. 전에 금리 인상이 없이 이루어지는 주식 시장의 호황은 거품이 아닌 실제 가치의 상승을 의미한다는 어떤 채권 애널리스트의 분석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의 나로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국내의 시장은 분명히 외국인이 주도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0.25%의 금리로 공급되는 미국의 막대한 유동성이 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인 현 시장 상황은 외국 자본에 지극히 의존적이다. 실물 경기는 위축되어 있고, 금융 경기는 과잉되어 있다.

2. 사외이사가 받는 고액의 연봉, 적은 업무량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사외이사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거고, 이는 해결이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다. 경영진이 자신들을 견재할 사외이사를 스스로 선출하는 아이러니.
 중소기업 고용불안의 원인이 젊은이들의 태도에 있었다면, 지난 10년간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는 감소했어야만 한다. 임금격차가 오히려 증가했다는 것은, 노동력 수급의 문제 이전에 중소기업의 경쟁력 자체가 대기업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용의 문제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다.

3. 유류세는 세수 확보, 양극화 해소와 외부효과의 비용 지불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지방세연구원에서 내놓은 보고서에 의하면 유류세의 인하는 효과가 미미하고, 부유층에 이익이므로, 유류세 선별적 환급이 보다 올바른 정책방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http://www.joseilbo.com/news/htmls/2012/03/20120309136302.html

 일시적인 정책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만 할 것 같다. 지난 해 남는 게 없다던 정유회사들 GS, S-oil, SK 이노베이션, 현대오일뱅크 등은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내고 승승장구했다. 에너지 기업의 과점이 계속 된다면, 앞으로도 유류가격은 쉽게 오르고, 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1)정부가 직접 유통시장에 참여하여 과점을 부수는 방법 2)유류세를 고정해서 가격변동을 줄이는 방법 등이 해법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선될 여지가 많은 부문에서도 정책 방향이 잘못되어 있거나 미진하다고 여겨질 때가 의외로 많다. 의사들 대다수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보험제도도 그렇고 말이지.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고상한 사람들

 버트런드 러셀의 좋아하는 글 조각들 가운데 '고상한 사람들(nice people)'이라는게 있다. 내용이 특별하다기보단 고상한 사람들을 '고상하게' 조롱하는 그 방법이 통쾌하기 때문이다.
 러셀의 시대에 존재했던 고상한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마지막 문단에서 러셀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고상한 사람들의 본질은, 협력을 지향하는 경향들이나 아이들의 부산스러움 속에 담긴 삶, 특히 성에 담긴 삶에 대해, 강박관념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증오하는 태도이다.'

 그 시대 고상한 사람들은 '보수주의'라는 이름 하에 권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할까. 오늘날엔 이런 '고상함'이 사라졌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고상한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손에 쥐고, 고상한 어법과 태도로 올바른 삶의 태도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가령 노동계의 운동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보자. 고상한 사람들은 노동계의 파업으로 피해를 보는 평범한 서민들을 가리키며 노동자들이 '일은 열심히 하지않고 공짜밥만 먹으려한다.'고 꾸짖는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기업의 사외이사로 부임한 고상한 사람들은 지난해 100대 기업의 이사회 상정 안건 2020건 가운데 단 1건을 반대로 부결시켰다. 그러면서도 봉급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받는다니 사실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겠는가?
 반면 노동계는 허구헌날 파업 등의 최종수단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년간 사회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으니 이들이 얼마나 게을렀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중소기업 고용불안을 비판하는 고상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또한 고상하다. 고상한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부족한 도전정신을 문제의 근본으로 짚는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지난 10년간 중소기업의 임금이 대기업의 70%에서 60%로 악화되었다니 말이다. 이는 지난 10년간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손해를 보더라도 중소기업에 뛰어들지 못한 젊은이들은 얼마나 도전정신이 부족한가!

 사실 고상한 사람들은 고상하다기 보다는 아주 전략적인 사람들이다. 기득권을 공고히하는데 고상한 태도는 지극히 도움이 된다. 가령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전혀  '고상하지 못한' 방법이다. 고상한 사람들은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컴퓨터 자판이나 서류를 끄적여서,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게 만들 따름이다.
 고상한 사람들은 얼굴도 예쁘고, 옷도 멋지고, 말투도 젊잖으며, 예의도 바르다. 또 아주 논리정연해 보이기도 한다. 막상 서민들은 실제로 보면, 옷도 지저분하고, 예의도 모르고, 말투도 천박하기 짝이 없다. 이런 점에서 고상한 사람들의 전략적 태도는 배울 점이 많다.
 고상한 사람들에게서 배울만한 점은 그게 다다.

2012년 3월 4일 일요일

왜 나는 영어를 못할까?

 나는 영어를 못한다. 이과계통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바닥이니 분명 못하는게 맞다. 무엇보다 열심히 공부해본 적이 없다. 영어가 중요하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와 영어 공부를 시작하려하니, 한참 뒤쳐진 레이스에 뒤늦게 에너지를 쏟는 느낌이 든다. 그냥 치과의사는 영어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치과의사 이전에 보다 나은 지식인으로서 삶을 살고 싶으니 창피하고 막막해도 참고 지금부터라도 해야한다.
 그런데 내가 왜 이리도 영어를 못하게 되었지? 왜 그렇게 공부를 안했을까?

 어릴 때부터 왠지 영어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중학교 시절에 동네 아주머님께 친구들과 함께 과외를 받았었다. 동네 주민들 사이에서 알음알음하여 꾸려지는 그룹과외였는데, 과외 아주머니 속만 썩혔고 아무 것도 얻어가지 못했다. 오죽하면 기억에 남는 건 빵점짜리 시험지와 못된 장난전화, 유모차 테러(!) 뿐이다.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과외받는 친구들 사이에서 공부를 안하는 것이 유쾌하게, 공부를 하는 것은 쑥스럽게 되버리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캐나다 퀸즈 대학의 Weili Ding과 Steven F. Lehrer가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아이의 학업 성취는 성취도가 높은 친구들과 어울릴 때, 또 친구들의 질이 비교적 균질할 때 더욱 향상된다.

http://www.nber.org/papers/w12305

 그렇다면 중학교 시절 영어공부의 실패는 그때 어울리던 개구장이 친구놈들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놈들!

 그러면 고등학교 시절에 나의 영어공부는 어째서 실패했을까? 고교 시절 나는 분명히 교우들의 1) 학업성취도가 높고, 2) 질이 균질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수준에 문제가 있었을까?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경제학자 Eric Hanushek은 학창 시절 좋은 선생님에게 1년 교육을 받는 학생은 일생동안 약 4600$를 더 '벌' 수 있다고 말한다.

http://www.nytimes.com/2012/01/06/education/big-study-links-good-teachers-to-lasting-gain.html?_r=1&scp=3&sq=Eric%20Hanushek&st=cse

 내가 다닌 특목고는 이과계열의 교육에 많은 비중을 쏟았지만 문과계열, 특히 영어 교육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수준에 특별한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영어수업의 비중이 너무 작았고, (나를 비롯한) 학생들이 제대로 된 모티베이션을 가지지 못했었다.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 인재를 양성하는데 영어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학교 측에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규 수업에서 영어에 할당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보충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특별히 영어가 보강된 교육을 제공해야만 하지 않을까 싶네.
 Malcolm Gladwell은 교육에 관한 칼럼에서 Eric Hanushek의 다른 연구에 의하면,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 teacher effect가 school effect는 물론이고, class-size effect도 압도한다고 한다.

http://www.newyorker.com/reporting/2008/12/15/081215fa_fact_gladwell?currentPage=all

 위 연구들이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타당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면, 왜 이런 경험적 불일치가 발생할까?
 아마도 특정 과목의 성취도는 커리큘럼(수업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 그런데 특목고의 커리큘럼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또한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절 내 영어 실력도 보편적인 학생들보다 높았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나라 공교육은 실제 영어 실력을 제대로 향상시키지 못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어 공부는 사실상 사교육에 의존하고 있다. 역시 아무리 권위있는 연구 결과라 하더라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되는 것 같다.

 자, 그럼 결론을 내려보자. 왜 나는 이렇게 영어를 못하는가?
 어릴 때 과외 수업을 엉터리로 받은 경험, 과학이 중요하지 영어가 뭔 소용이냐는 착각, 안타까운 공교육의 현실 때문이다. 덕분에 모티베이션이 상실된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것이 궁극의 원인이요 결과인 것이다.
 의무적인 포스팅은 여기까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