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7일 수요일

버클리 주교와 정신적인 나무



 어떤 젊은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무척 신기하게 여기리라. 뜰 안에 아무도 없을 때, 거기 전과 다름없이 나무가 그냥 서 있는 것을 보고." 버클리가 대답하기를 "친애하는 선생이여. 당신이 놀라는 것이 이상하구려. 나는 언제나 이 뜰 안에 있어요. 그리고 이 나무는 계속해서 존재하겠지. 당신의 충성스러운 신이 언제나 이 나무를 보고 있으므로." -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철저한 관념론자는 우리가 느끼고 보는 모든 것들이 단지 우리의 정신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한다. 저기 어느 언덕 위에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이 나무를 바라볼 수 있고, 그 때 나무는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나무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몇 가지 재미있는 예를 드는데, 가령 그들에 의하면 관념론자는 정거장에 있을 때엔 기차의 바퀴를 볼 수 있지만, 기차 속에 들어가 앉은 다음엔 기차의 바퀴를 볼 수가 없다. 물론 우리의 상식은 승객들이 바퀴를 볼 때에 기차가 갑자기 나타나고, 보고 있지 않으면 갑자기 없어진다는 것을 인정치 않는다.

 버클리 주교는 관념론자이지만, 우리가 보지 않을 때에도 사물은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근거는 어디까지나 신이 모든 것을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기에 사물은 존재한다. 그는 신을 바탕으로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상식과 조화시키려 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담은 저서가 '힐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이다. 여기서 힐라스는 상식을 대표하고, 필로누스는 버클리 자신이다. 저서에서 힐라스와 필로누스는 오감(五感)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과정에서 필로누스가 예시와 논증을 두루 사용하여 끝내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힐라스와 필로누스는 감각 그 자체에 대해 의견이 일치된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을 부정하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감각은 그 너머에 있는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 내가 사과를 바라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포착된 감각의 연합이 그 너머의 존재를 암시할 뿐, 사실상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들은 정신 안에 있다. 필로누스는 말한다. "무엇이든지 직접 지각되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다. 그런데 관념이 정신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는 주장한다. "감각의 어떤 직접적인 대상이 비사고적인 실체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정신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때, 사실은 사물 그 자체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각만을 지각한다는 주장은 참이다. 하지만 버클리는 더 나아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증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버클리의 주장은 '관념들은 정신 속에 있다.'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단지 항진명제(恒眞命題)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라는 명제를 보면, 이는 어느 면에서 보아도 참이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새로운 사실도 담겨있지 않다. 동어반복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버클리가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성공했다고 착각한 것은, '관념'이란 낱말에 대한 그의 실수 탓이다.
 버클리는 '감각하는 작용'과 '감각의 재료'를 구분하지 않는 오류를  범했다. 둘 모두를 '관념'으로 보았기에, 관념을 벗어난 사물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둘은 다르다. 감각하는 작용은 관념이라고 볼 수 있으나, 감각의 재료는 관념 밖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사과를 보고 붉은 빛깔을 느낄 수 있는데, 붉은 빛깔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났다고 해서 그 붉은 빛깔을 일으키는 재료가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재료는 분명히 우리 마음의 밖에서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인식할수 없다."라는 명제를 보자. 이 명제도 흔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판단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이 명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반박하기 쉽지 않다. 이 명제를 엄밀히 분석하면, 여기서 첫 번째 사용된 '인식'이란 낱말이 두 번째 사용된 '인식'이란 낱말과 다른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 명제를 해결하는 핵심이 된다. 첫 번째 '인식'은 지각을 의미하고, 두 번째 '인식'은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동음이의어를 인식하면 이 명제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버클리가 '관념'이란 낱말을 사용할 때 '감각하는 작용'과 '감각의 재료'를 구분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오류이다.

 오늘 3월 27일은 나의 생일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시간이 점점 빨라져 가는데, 나의 '감각하는 작용'이 점점 빨라지는 탓인지, '감각의 재료'가 변하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사랑의 민낯




 너무 오랜만의 포스팅이다. 두 가지 변명거리가 있는데, 우선 치과공부에 집중하면서 다른 서적이나 뉴스를 거의 읽지 않다보니 블로그에 할 말이 줄었고, 또한 보건소의 새 사업이 시작되면서 다른 시기보다 바쁘기도 했다. 물론 둘 다 핑계이다.
 특단의 조치로 한 달에 최소 3회 포스팅을 하기로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글이 3월의 첫 포스팅이다.

 개인적으로 즐겨다니는 블로그가 몇 개 있는데 그 중 가장 독특한 블로그는 왠 역술인이 하는 블로그이다. 무려 6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새로운 글을 포스팅하는데, 자주 방문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다.
 나는 역술을 믿지 않지만 역술인은 믿는다. 그 역술인이 긴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하며 쌓은 막대한 경험을 믿는다는 말이다. 역술인들은 매일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듣고, 어떤 방식이든 해법을 제시해준다. 그리고 충실한 상담인들은 자주 재방문하여 그 예후를 추적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대단한 임상경험이고, 근본적으로 나같은 의사들이 매일같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역술이 의학처럼 믿음직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를 토대로 해석을 하는 역술인 역시 그만큼 덜 신뢰해야 옳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의사는 병을 치료해주는 사람이고 의학적 지식이 꼭 필요하지만, 역술인은 삶에 대해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다. 어쩌면 역술이라는 건 단지 부차적인 것이고, 그 사람의 특징과 문제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제시해주는 게 역술인이 하는 일이다. 역술인에게 필요한 능력은 근본적으로 훌륭한 멘토에게 필요한 능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역술인이 막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만큼 충분히 지혜롭다면, 그의 조언은 훌륭한 멘토의 조언과 마찬가지로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블로그의 역술인은 밤업소에 다니는 여성을 많이 상담한다더라. 당연히 다양한 남녀문제를 접하고 상담해온 모양이다. 남녀문제에 관한 한, 나름대로 상당한 전문가인 셈이다. 작년에는 친한 친구가 결혼을 고민할 무렵, 친구와 더불어 직접 그 사람을 방문한 적도 있다. 아주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서론이 길었다. 최근 그 블로그에서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아주 좋은 글을 읽었다. 허락없이 조금 옮겨볼까 한다.

 사랑은 시한부다. 아주 당연히 시간이 가면 마음이 달라진다. 마음이 달라진다고 해서 미안해하거나 욕하지 말거라.
 사랑은 조건부다. 조건없는 사랑을 하는 인간은 정신질환이 있다.
 사랑은 당연히 변한다. 변치않는 사랑은 집착이다. 사랑할 때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아야 한다. 나중에 파토나면 그래도 추억이라도 남는다.
 사랑과 미움은 손바닥과 같다. 사랑은 많이하고 자주하되, 변하면 깨끗이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미리 포기해도 좋다. 
 사랑은 팔자다. 달리 말하면 사랑도 체질이 있는 것이다. 사랑을 전혀 안하는 사람도 많다. 사랑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덧붙이고 싶은 말이 조금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