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0일 목요일
방황하는 윤리
레 미제라블을 본지 꽤 되었는데, 이제야 글을 조금 써볼 마음이 들었다. 레 미제라블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영화지만, 역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장발장과 자베르 경감의 대립구도였다. 둘의 대립은 죄를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을 대변한다.
자베르 경감은 확고한 원칙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장발장은 빵을 훔쳤으니 죄인이고, 붉은 혁명을 외치는 젊은이들은 국가에 반역했으므로 죄인이다.
반면에 장발장은 보다 인간적이다. 그는 따뜻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지만, 죄를 범해야만 선을 베풀 수 있다는 모순에 고뇌한다.
나는 우선 죄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관점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1. 자베르 경감의 윤리관은 의무론적이다. 도둑질은 해서는 안되고, 국가에 반대하여 궐기하면 안된다. 도둑질로 주린 이를 구할 수 있어도, 혁명으로 빈민층을 구제할 수 있어도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극단적인 상황을 한 번 가정해보자.
인류가 멸망해서 한 쌍의 오누이만 살아남았다. 근친상간은 분명히 죄로 여겨진다. 그런데 근친상간을 범하지 않고선 인류가 존속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의무가 확고하다고 볼 수 있을까? 나로선 회의적이다.
반면에 장발장은 목적론적으로 윤리를 바라보는 것 같다. 주린 이의 배를 불릴 수 있다면 도둑질도 정당화될 수 있고, 빈민층을 구제할 수 있다면 국가에 대한 반역도 가능하다. 물론 장발장을 목적론을 대표한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그의 윤리관은 다소 모호하고 소극적이다. 마지못해 도둑질을 하기는 하지만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마리우스를 구하던 중 만난 자베르 경감에게 이 일만 끝나면 죗값을 치르겠노라 설득한다. 어쨌든 목적론적 윤리관도 극단까지 밀어붙인, 또다른 상황을 그려보자.
표류된 배에 동료 선원과 함께 난파당한 인물이 있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그는 동료를 잡아먹어야만 한다.
여기서 그가 목적론적 윤리관을 확고히 받아들일 때, 그는 망설임없이 다른 선원을 잡아먹을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이라는 목적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행위는 타당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고자 끔찍한 수단을 저지르는 이 모습에는 어딘가 인간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의무론도, 목적론도 명확한 윤리관을 확보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의무론은 의무가 이해와 일정 수준 이상 대립할 때 그 힘을 잃는다. 목적론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기 힘든 지점에서 그 힘을 잃는다.
또한 보다 근본적으로, 두 윤리관은 확고부동한 의무나 목적이 세계로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전제를 증명하고자 과거부터 무수히 많은 철학자, 종교인들이 노력해왔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모두 다 오류로 결론난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장발장과 같이 목적와 의무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자베르는 적극적으로 선을 달성하려 하기보다는, 악을 금하는 것에 의무를 부여하는 듯 보인다. 이와 같이 금기를 내세우는 윤리관은 주로 보수적인 세력의 지지를 받아왔고, 변화를 억누르고 안정을 도모하기에 적합하다. 장발장은 적극적인 선행에 목적을 두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기독교적인 죄책감이 발목을 잡는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겼기에 행복하지 못했고, 세상과 소통하기보다는 주로 숨어 은둔했다.
내가 보기에 장발장은 그다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 않고, 그가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발장이 일생동안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죄책감을 덜고자 노년에 코제트를 속이고 교회에 숨어서 죽음을 준비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악을 억누르는 것보다, 선을 권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윤리가 더욱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 나는 윤리란 자연적인 본능에 기반한 사회적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윤리관을 이제부터 이야기해보자.
먼저 세상에 단 한 명의 인간만이 존재하는 상황을 그려보자. 이 때 그 인간은 어떠한 윤리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체로서 자연적인 본능에 구속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끼고, 물을 마시시 않으면 갈증을 느낀다. 여러가지 물리적인 자극에 고통을 느끼고, 그러므로 한 번 상처를 경험하면 공포를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깨달으면 무엇보다도 살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느낀다.
자 그러면 이제 가정을 바꿔서 세상에 두 명의 인간이 존재하는 상황을 그려보자. 우선 여기서 인간은 동질감을 느끼고, 의사소통을 나누고, 연합을 하고픈 자연적인 본능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인간의 본능은 앞서 언급한 다른 종류의 본능과 합하여 드디어 동의에 의한 첫 번째 윤리를 탄생시킨다. 이를 1차 윤리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1차 윤리는 살인을 하지 말 것, 고통을 가하지 말 것과 같이 우리가 본능적으로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제 세상에 더 많은 인간이 존재하고, 이들이 복잡하게 연합하여 사회적 단위를 이루는 상황을 그려보자. 이제 1차 윤리만으로 이 복잡한 집단의 연합을 지탱할 수 없다. 여기서 2차 윤리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는 새치기를 하지 말 것, 어른에게 대들지 말 것과 같은 그나마 익숙한 것들도 있지만, 때로는 작전을 통해서 주식 차익을 거두면 안되는 것과 같이 매우 복잡한 것들도 포함하고 있다.
1차 윤리에 비하여 2차 윤리는 본능과의 거리가 더 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생활을 통해서 복잡한 이들 윤리를 학습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복잡한 증명은 생략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세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약속만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충분한 구속력을 얻을 수 있을까? 결국 윤리란 당장의 이해와 늘 일치하지도 않고, 때로는 모순에 빠지기도 하는 모호한 개념이지 않은가. 버트런드 러셀은 확실한 윤리관을 세우는 것이 철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윤리는 다소나마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을 겪은 뒤 생각이 바뀌어, 윤리의 주관성을 인정하기엔 꺼림직한 기분이 든다고 털어놓곤 했다. 윤리가 주관적이라면 나치 독일의 잔혹성도 그들의 주관일 따름이라 비난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인간에게 윤리란 모호한 약속과 습관, 본능의 연합으로 남는 것 같다. 장발장은 가슴깊이 연민과 사랑을 가졌고, 확신보다는 자주 고뇌하는 인물이었다. 너무 인간적이라서 더욱 공감이 가는 그런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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