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4일 일요일

왜 나는 영어를 못할까?

 나는 영어를 못한다. 이과계통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바닥이니 분명 못하는게 맞다. 무엇보다 열심히 공부해본 적이 없다. 영어가 중요하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와 영어 공부를 시작하려하니, 한참 뒤쳐진 레이스에 뒤늦게 에너지를 쏟는 느낌이 든다. 그냥 치과의사는 영어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치과의사 이전에 보다 나은 지식인으로서 삶을 살고 싶으니 창피하고 막막해도 참고 지금부터라도 해야한다.
 그런데 내가 왜 이리도 영어를 못하게 되었지? 왜 그렇게 공부를 안했을까?

 어릴 때부터 왠지 영어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중학교 시절에 동네 아주머님께 친구들과 함께 과외를 받았었다. 동네 주민들 사이에서 알음알음하여 꾸려지는 그룹과외였는데, 과외 아주머니 속만 썩혔고 아무 것도 얻어가지 못했다. 오죽하면 기억에 남는 건 빵점짜리 시험지와 못된 장난전화, 유모차 테러(!) 뿐이다.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과외받는 친구들 사이에서 공부를 안하는 것이 유쾌하게, 공부를 하는 것은 쑥스럽게 되버리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캐나다 퀸즈 대학의 Weili Ding과 Steven F. Lehrer가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아이의 학업 성취는 성취도가 높은 친구들과 어울릴 때, 또 친구들의 질이 비교적 균질할 때 더욱 향상된다.

http://www.nber.org/papers/w12305

 그렇다면 중학교 시절 영어공부의 실패는 그때 어울리던 개구장이 친구놈들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놈들!

 그러면 고등학교 시절에 나의 영어공부는 어째서 실패했을까? 고교 시절 나는 분명히 교우들의 1) 학업성취도가 높고, 2) 질이 균질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수준에 문제가 있었을까?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경제학자 Eric Hanushek은 학창 시절 좋은 선생님에게 1년 교육을 받는 학생은 일생동안 약 4600$를 더 '벌' 수 있다고 말한다.

http://www.nytimes.com/2012/01/06/education/big-study-links-good-teachers-to-lasting-gain.html?_r=1&scp=3&sq=Eric%20Hanushek&st=cse

 내가 다닌 특목고는 이과계열의 교육에 많은 비중을 쏟았지만 문과계열, 특히 영어 교육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수준에 특별한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영어수업의 비중이 너무 작았고, (나를 비롯한) 학생들이 제대로 된 모티베이션을 가지지 못했었다.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 인재를 양성하는데 영어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학교 측에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규 수업에서 영어에 할당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보충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특별히 영어가 보강된 교육을 제공해야만 하지 않을까 싶네.
 Malcolm Gladwell은 교육에 관한 칼럼에서 Eric Hanushek의 다른 연구에 의하면,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 teacher effect가 school effect는 물론이고, class-size effect도 압도한다고 한다.

http://www.newyorker.com/reporting/2008/12/15/081215fa_fact_gladwell?currentPage=all

 위 연구들이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타당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면, 왜 이런 경험적 불일치가 발생할까?
 아마도 특정 과목의 성취도는 커리큘럼(수업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 그런데 특목고의 커리큘럼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또한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절 내 영어 실력도 보편적인 학생들보다 높았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나라 공교육은 실제 영어 실력을 제대로 향상시키지 못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어 공부는 사실상 사교육에 의존하고 있다. 역시 아무리 권위있는 연구 결과라 하더라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되는 것 같다.

 자, 그럼 결론을 내려보자. 왜 나는 이렇게 영어를 못하는가?
 어릴 때 과외 수업을 엉터리로 받은 경험, 과학이 중요하지 영어가 뭔 소용이냐는 착각, 안타까운 공교육의 현실 때문이다. 덕분에 모티베이션이 상실된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것이 궁극의 원인이요 결과인 것이다.
 의무적인 포스팅은 여기까지 ㅋ

댓글 2개:

Wonyoung Kim :

우리 때 과학고 영어 교육은 정말 최악이었음. 선생님 수준은 괜찮았다 쳐도 분위기 자체가 영어 따위 중요하지 않다는 식인게 진짜 문제였다고 봐. 지금 생각하면 진짜 웃겼던게 수학, 물리처럼 머리 쓰는 과목 잘하는건 훌륭한거고 영어 같이 암기해야 하는 과목을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하면 창피한거라는 식이라는 생각이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거 같애. 공부 별로 안하고 시험 잘보면 머리 좋은거라 좋은거고 엄청 성실해서 영어 점수 잘 나오면 "그냥" 노력파인거고. 솔직히 과학고에서 몇 명이나 과학에 커리어를 바친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과학 수업에만 그렇게 치중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진짜 어릴 때부터 과학, 수학 집중 영재교육을 받아야 제 실력을 낼 수 있는 천재는 몇 년에 하나 나오지 않을까. 나는 과학고 없애버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애들 책 많이 읽히고 토론하고 발표하고 글쓰기 시키고 영어 교육 엄청 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그 때 물리, 화학, 생물, 지학, 게다가 각 과목 실험시간까지 들인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다.

지금도 기억나는게 중학교 때까지 나는 외고 간다고 영어 학원 많이 다니는데 외고 준비하는 애들 중에 평생 한국에만 있었던 토종들인데도 영어 잘하는 애들이 진짜 많더라고. 그러다가 형이 외고 갔는데 별로라고 가지 말라고 해서 일반고는 가기 싫으니 과학고를 갔는데 애들 영어 실력 보고 정말 경악했는데 더 놀라웠던건 실력이 그래도 전혀 공부할 생각을 안하고 그게 문제라는 인식도 별로 없었다는 것. 수학 과학만 잘하면 장땡이라는 분위기가 정말 문제라고 생각해. 아 이 얘기만 나오면 흥분해서 댓글이 엄청 길어졌다ㅋㅋ

Spiritz :

Wonyoung Kim/오오 얼마만의 댓글이냐. 3월에는 네가 좋아하는 주제 위주로 글을 써서 댓글 좀 받아먹어야겠다. 많은 부분 동의한다. 결국 공교육 과정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학업 성취도를 test score로 평가하기 때문에 한계점을 가지는 거 같다. 학풍(學風)의 힘이 간과돼. 그런 점에서 진짜 중요한게 뭔지 일깨워주는 멘토가 부족했던게 우리 고교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다. 실제로 외고의 경우, 그 안에서 특출난 위치에 오를 수만 있다면 이후의 과정에서 과학고보다 오히려 더 많은 장점이 있을 수도 있겠어. 뭐 나로서는 결혼하고 나서 고민해도 되는 문제다 ㅋ